'빈 배'나 '죽은 배'로 만들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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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빈 배가 와서 그의 배에 부딪치면,
그가 성질이 아주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를 내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을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
-‘빈 배’, 장자(莊子)-
〈*토마스 머튼 역(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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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에서 갠 날 궂은 날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인생 여정에서
곤욕을 당했을 때나 상처를 입었을 때 그래서 우울한
마음이나 번잡한 마음이나 괴로운 마음이 들 때마다
저 ‘빈 배’라는 ‘장자의 지혜’를 자주 음미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 ‘빈 배’와 금세 오버랩 되어오는
성경 말씀이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to the slaughter)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53:7)
그렇게 저 ‘빈 배’나 저 ‘죽은 배’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묵상하다 보면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평안’이 절로 찾아오곤 하더라고요.
모르긴 몰라도, 20세기 트라피스트 수도사이자 영성가이자
저명한 문필가였던 토마스 머튼이 ‘신구약중간기시대’를
살다간 장자의 저 ‘동양의 지혜’를 애써 번역한 것도
그것을 삶의 지혜로 거듭 체험 및 공감했던 때문일 것
같다 싶습니다. 그럴 것이 ‘빈 배’와 맞서 다투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희생양’ 내지 ‘죽은 자’와 맞서 다투는
사람도 없기 마련이니까요.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립보서2:3~4)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마음’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문제는 죄성(罪性)이 강한 그래서 동물의 세계처럼 배타성이 강한 인간 우리의 마음은 결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되레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 남을 지배하며 다스리기 좋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세계 역시 동물의 세계처럼 태생적으로 내로라 군림하며 ‘갑질’하기를 좋아합니다.
실인즉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부터가 자기들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금기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어버렸습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아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저들은 물론이고 그 후예인 우리들 역시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외려 마귀를 닮아 마귀와 같은 타락한 정체성을 가진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또한 남이나 이웃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 내지 섬기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세상에 오신 ‘둘째 아담’이자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는 넓은 의미의 ‘선악과’일 수 있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따먹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사십일 금식’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마귀가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하며 ‘떡’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과시욕 내지 영웅의식으로, “내게 경배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네게 주리라”는 부귀영화로 각각 시험 및 유혹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세 차례 모두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끝까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지킴으로써,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마침내 이긴 것입니다. 마귀는 천사의 탈을 쓰고 ‘말씀’으로 시험할 수는 있어도, ‘말씀’을 끝내 이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셨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드니라.-(마태복음4:10~11)
따라서 창세기에서 사탄의 시험에 먹힌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에 의해 잃었던 그 동산 그 ‘낙원(paradise)’이, 저렇듯 사탄의 시험에 이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심령의 낙원’이자 ‘현재적 천국’이 마침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진실로 ‘하늘의 복이 있는’ 겸손한 마음, 섬기는 마음을 회복하려면 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만 가능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 ‘구원’ 자체가, 그 ‘낙원의 회복’ 자체가, 바로 '내 배' 내지 '내 인생'의 참 주인이자 만유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의 비밀’이자 ‘그리스도의 비밀’이자 ‘성령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1:1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기 정체성을 ‘작은 자 중의 작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심지어 저렇듯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참으로 그 ‘깨달음의 세계’가 깊고 큰 자기 성찰이자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자 중의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 눈에는 남이나 이웃 그 모든 사람이 절로 ‘나보다 낫게’ 여겨질 수밖에요. 저 사람이 악인(惡人)이다 쳐도 ‘괴수’인 나보다는 덜 악인이다 싶고, 저 사람이 약자(弱者)다 쳐도 그래서 되레 나보다 흉악한 죄를 덜 지었다 싶어 인간 이해나 포용의 스펙트럼이 절로 넓어지고 관대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기 전에는 ‘완악하리만큼 교만한 자’이자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던 대단한 지식인 사도 바울이 저렇듯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과연 그의 고백 그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린도전서15:10)였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서 거듭나게 해주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으며 살고자하는 중심을 주셨기에 '빈 배'나 '죽은 배'나 '죽은 자'의 삶이 가능했다는 그 섭리의 ‘은혜’에 대한 체험적 감사의 고백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참 삶의 비밀’ 곧 ‘부활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비밀인 ‘케노시스’ 삶의 비밀을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적극 권유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2:5~8)
저 말씀에서 자기를 ‘비우다(empty))’의 명사인 ‘비움’이 헬라어로 ‘케노스’입니다. 그리고 ‘낮추다(humble)’의 명사인 ‘낮아짐, 비천함’이 ‘타페이노시스’입니다. 해서 저 두 단어를 합성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비움과 낮아짐’의 삶을 신학용어로 ‘케노시스’론(論)이라고 지칭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 3세기 무렵을 살다간 것으로 추정되는 저 ‘장자’의 비전일 수 있는 ‘빈 배’론(論)이자 기원전 7세기를 살다간 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대속(代贖)의 희생양’(이사야53:)에의 비전이 마침내 세상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저 ‘비움과 낮아짐’의 삶을 통해 다, 온전히, 성취된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그 비전이자 비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특별계시’이자 진리였음을 또한 확신하게 됩니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을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우리 자신을 ‘빈 배’나 ‘죽은 배’나 타인을 위한 ‘희생양’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우리와 맞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에 고통과 상처를 입히는 ‘저주의 십자가’조차도 우리의 심령에 상처를 입히지는 못할 것입니다. 되레 미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줄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역시 자기를 이길 수도 있고,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강을 건너는’ 오늘 저나 우리의 ‘배’는 과연 ‘빈 배’일까요? 각종 이기심이나 소유욕이나 지배욕으로 가득 찬 ‘탐욕의 배(船)’이자 ‘배(腹)’인 것은 아닐까요? ‘자귀 난 배’가 참으로 행복한 배는 아니겠지요? 거기 참 삶, 참 가치, 참 생명이 있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