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지하의 땅굴, ‘카타콤의 영성(靈性)’

이형선 2013. 4. 15. 10:20

 

세상을 사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은

가난이나 약한 것이나 몸과 마음의 각종 병고(病苦)나

고통이나 능욕을 당하는 일 등입니다.

‘기복신앙’의 가치관으로 볼 때,

그런 것들은 분명히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세상을 살면서 크거나 작게나,

그런 일을 당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인생의 문제가 없는 나라도 없고,

가정도 없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교회도 없고, 수도원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의인(義人)이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런 세상살이의 문제들을 어떻게 이기고 사느냐,

그것이 늘 인생의 숙제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그런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되레 ‘기뻐’한다면,

나아가 그것들을 되레 ‘자랑한다’면,

그런 가치관과 우주관을 가진 사람을 누가 대적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강한 자가? 권력자가? 부자가? 사탄이?

찾아왔다가도 ‘대책 없는 자’라며 되레 혀를 내두르고 두 손을 들고 말겠지요.

세상의 가치관이나 평가에 전혀 매이지 않는, 얼마나 멋진 ‘자유’입니까!

세상의 이른바 성공이나 출세라는 그 어떤 신분이나 자리에도 매이지 않는,

얼마나 멋진 자유입니까!   

우리도 한 세상 그렇게 살다갈 수는 없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사도 바울도 그렇게 살았고

아울러 이런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12:9-10)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살았던

신앙 선배들의 삶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브리서11:36-38)

 

 

한 마디로, 우리가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권하고, 성경을 묵상하며 사는 것은 그 속에 저 모든 인생의 문제나 숙제들을 풀어내는 창조주 하나님의 해답 곧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사도들이나 모세를 위시한 선지자들이나 신앙 위인들의 삶을 통해 계시되고 구현된 ‘말씀’이 그것입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 곧 성령(聖靈)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결코 이천 년 내지 육천 년 전의 해묵은 인간의 역사를 기록한 왕조실록도 성현의 실록도 아닙니다. 굳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성어를 운위할 것도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로 고달픈 나그네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성령(聖靈)을 통해 늘 실존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생명’인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모진 박해나 환난 속에서도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순교자적인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실인즉 ‘세상’은 되레 감당하지 못합니다.

저런 삶이 바로 재물이나 권세나 향락이나

허세 내지 허영 등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이길 수 있는,

우리가 진정으로 본받아야 할 ‘십자가의 영성’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중심인 ‘기복신앙’의 가치관을 이길 수 있는,

우리가 진정으로 본받아야 할 ‘순교자의 영성’ 내지

지하땅굴 ‘카타콤(catacomb)의 영성’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곧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AD 313년에 ‘밀라노 칙령’이 공표되기 전까지, 모진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살던 땅굴이자 지하교회이자 묘지를 역사는 ‘카타콤’이라고 부릅니다.

로마 근처에서 발견된 10-20 미터 깊이의 카타콤은 무려 60여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미로처럼 얽혀서 4-5층으로 된 큰 곳은 2천여 명까지도 살 수 있었는데, 그런 카타콤에 매장된 시신들이 무려 600만여 명에 이르고 그들의 평균 수명은 35세 정도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죽어도 사는’ 부활 신앙에 대한 확신.

하나님 나라(天國)와 내세에 대한 확신.

그런 절대 가치 내지 절대 비전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만, ‘처음사랑’에 대한 순수함이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순교자의 길이나 일생 동안 캄캄한 지하 땅굴 속에 숨어 비참하게(?) 살다 요절하는 삶의 길을 택했던 저런 신앙선배들의 신앙을 본받는 사람들은, 오늘의 어렵거나 고통스러운 그 어떤 환경이나 형편이나 여건 속에서도 낙담이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 내지 비관하거나 절망 운운한다면 차라리 부끄러운, 감정의 사치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카타콤의 영성’으로 집약되는 저 신앙선배들의 절대 가치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차라리 무모(?)하리만큼 치열한 인생의 가치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럴 것이 상대적으로 순교는 차라리 ‘순간적’입니다. 한순간에 칼이나 총에 맞아죽으면 됩니다. 그러면 고난도 고통도 끝납니다. 그러나 일생을 순교자적으로 산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일생을 지하땅굴 속에 숨어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여하간 그 해답은, 카타콤의 벽면 곳곳에 그려진 ‘물고기’ 형상의 그림이 대변해줍니다. ‘물고기’는 헬라어로 ‘익투스(ΙΧΘΥΣ)’입니다. 풀어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라는 다섯 글자의 이니셜의 조합어이자 은어(隱語)가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신하며, 스스로 순교자적 삶의 길을 택해서 ‘기뻐하며’ 간 것입니다.

 

세상 및 인생의 가장 낮은 곳인,

캄캄한 지하의 땅굴 속에 숨어 살다  

35세를 일기로 요절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다 죽고 싶었던 삶.

그리스도 안에서 뜻있게 살다가 뜻있게 죽고 싶었던 삶.

그런 믿음과 삶이 또한 저나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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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산꼭대기에서 하는 경험보다

 골짜기에서 하는 경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찰스 스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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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믿음이 건강하다면,

 소망은 결코 병들지 않는다.-

 

 

 

 

                                *존 번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