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땅보다 높은 하늘'의 시각과 가치관

이형선 2013. 8. 5. 10:27

 

청년 시절에

장교인 친구 덕분에

군용헬기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라는 것을 타본 것은

그때가 난생 처음이었지요.

그래서 그때의 인상이 지금도 선합니다.

 

 

고도가 높은 하늘에서 보니,

우편의 땅도 좌편의 바다도

색깔만 다를 뿐 그냥 한 폭의

아름다운 자연으로 보이더라고요.

내로라하는,

도시의 고층 건물도

웅장한 대형 건물도

그냥 아이들이 세워 놓은

일개 성냥갑처럼 보이더라고요.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그냥 평등한 개미들처럼

다 똑같이 보이더라고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고도를 더욱 높이다 보니, 

그나마의 성냥갑이나 개미들 모습조차도

아예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것이 하나님의 시각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이 아닐까요? 그것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그래서 구별된, 하나님나라의 가치관 아닐까요?

그럴 것이 그런 시각에 열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나 재(dust and ashes)'(창세기18:27)라는 자기 존재의 고백을 했고, 하늘의 하나님께선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O worm Jacob)"(이사야41:14)라고 부르신 적도 있으니까요.

따라서 그것이 또한 세상의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55:8-9)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한복음8:23-24)

 

 

그렇습니다.

‘위에서’ 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래서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사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가치관, ‘땅보다 높은 하늘’의 시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하늘나라 그 의 그 사랑 그 가치관을 세상에 구현하고자 치열하게 사신 분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도 ‘죄’를 논하고, 죄 가운데서의 진정한 구원과 진리를 설파하려면 먼저 세상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구별된 그리스도의 마음과 시각과 가치관을 가질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나 세상을 진실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신학이나 성경 지식을 달달 외어서 된, ‘먼저 사람이 되지 못한’ 그런 목회자가 아닙니다. 육법전서나 의학전서 죽기 살기로 달달 외어서 된, ‘먼저 사람이 되지 못한’ 그런 판검사나 의사가 아닙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는 술수나 비리나 부정이나 폭력이라도 불사하며 재물을 모았거나 권좌에 오른, ‘먼저 사람 되지 못한’ 그런 부자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회나 세상을 진실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된’ 그런 참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인격’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개미들’ 키재기 하는 혹은 ‘도토리들’ 키재기 하는 인생살이이자, 도화지에 각각 자기 욕심 크기의 ‘성냥갑’ 그리다가 가는 인생 여정에서, 우리가 크고 잘나면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우리가 작고 못나면 얼마나 못났겠습니까?

우리가 의인이라면 얼마나 깨끗하고 얼마나 거룩한 의인이겠습니까? 우리가 죄인이라면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겠습니까?

‘개미’가 ‘개미’를 서로 교만하게 판단하고 증오하고 심판할 종말론적 자격은 없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럴 것이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일 수 있는

존재의 당위성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창1:27)을

가졌기 때문인데, 그런 하늘의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이 없으면,

자기를 ‘비우고 낮추며(kenōsis)’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타적인 심령(心靈)이 없으면,

우리 모두는 땅의 여느 동물이나 벌레인 저들과

그 삶이나 그 가치나 그 죽음이

하등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겉모습의 세계는 다 같이

썩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가치 아닙니까.

 

 

따라서 저 모든 땅의 것을

가졌다고 해서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한 철의 위세를 부릴 것도 없습니다.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주눅이 들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대로

‘일용할 양식’ 정도만 있다면,

부러워할 것도 시기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을 진실로 영원히 살리는 가치는,

상대적으로 보다 많이 가진 소유나

그것을 위한 탐욕이 아니라.

되레 ‘자족(自足)하는 마음’이니까요.

 

 

진실로 산 자는,

진실로 복이 있는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을 땅에서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사람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도 출세도 좋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한

그런 성공이자 출세여야 합니다.

보다 많은 이웃의 영혼과 육신을

자기 몸처럼 살리고자 하는,

그런 목적의식과 가치관이 분명한

성공과 출세가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성냥갑’이나 높이 세우고,

‘개미들’ 중에 난 자가 되어

자기 폼 잡고, 자기집안 꽃 피우기 위한

그런 이기적인 성공이나 유치한 출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니까요.

 

 

하나님이 남보다 더 잘 된 축복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어려운 이웃을 남보다 더 많이 섬기며,

많이 살리며, 많이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는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남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 나갈 때,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영원한 하늘은행에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많이 저축한 사람은

금세와 내세에 하늘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선(善)의 기회는 늘 ‘오늘 여기서(Here and Now)’입니다.

내일이면 너무 늦을 수 있으니까요.

내일이면 너무 허무해질 수 있으니까요.

 

 

19세기의 영국을 살린,

찰스 스펄전 목사가 이런 말을 했었지요.

 

 -시간은 짧다. 영원은 길다.

  이 짧은 삶을 영원에 비추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자기도 살리고 남들도 살리는

복된 지식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시각과 가치관과는 확연하게 구별된

하늘나라의 시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렇게 기도하며, 힘쓰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