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북한의 핵보유 문제가
남북 민족간에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예민한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 내지 우파와 좌파라는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에 사로잡혀
스스로 정의의 투사라도 되는 것처럼,
애국의 화신이나 수호자나 선구자라도 되는 것처럼
일선에 나서서 투쟁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예사롭게 적대하며
막말과 욕설로 비판 및 매도하는 것은 이미 항다반사이고,
심지어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을
아예 죽여버린 악행까지 자행되었더군요.
그런 사례들이 전쟁의 상처와 이념이 서로 다른 남북 분단과
분쟁의 비극을 안고 살아야하는 우리 민족의 태생적인
고난이자 고통이자 불행의 단면일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왜 우리 민족에게
지금까지도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을 허락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근원적인 문제나 해법은 이념이나 핵무기
그런 유형의 문제 그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럴 것이「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이란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20세기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이 이런 말을 했었지요.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의 이기주의이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안에 똬리를 튼 채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기주의’입니다.
전쟁도 처참한 살상과 학살도, 분단도 이념도,
각종 막말과 욕설도, 다 영웅의식이나 돌출의식에
사로잡힌 특정 인물들의 이기주의 내지
집단이기주의에서 비롯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지요.
-이기주의에 의하여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은
신앙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근원적인 인간 이해이자 해법입니다.
그것이 근원적인 사회 이해이자 그 해법입니다.
진정한 사회 구원 내지 민족의 구원도 거기서 온다는 것.
남북 우리 민족 모두가 역사의 참 주인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양심 내지 신앙인격에 열려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보수파의 선봉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서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사탄’이니 ‘빨갱이’ 등으로 매도하는 것도,
진보파의 선봉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서서 ‘민족’이니
‘주체’니 하는 종북적 맹신적 외침도 다 역겹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납니다.’
정치인이자 흑인 목사였던 제시 잭슨의 명연설을 다시 들어봅시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십시오.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습니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이나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납니다.
사람은 좌우의 팔다리로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새도 사람도 그 머리는 하나라는 것 말입니다.
새도 사람도 좌우를 통일 및 화합시키는,
일체화시키는 머리는 하나입니다.
나아가 인생의 참 머리이자 역사의 머릿돌인
구원자 그리스도 역시 하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자 창조의 지혜입니다.
머리가 ‘하나님의 형상’인 이타적인 그리스도가 아닌,
‘이기주의 형상’인 자기 머리라면 아무리 피땀을 흘리며 분투해도
하나 되는 공존의 평화나 통일의 길과는 거리가 멉니다.
만에 하나, ‘종북 주사파’ 출신이 한국 대통령이 되면 남북이 금세 평화적으로 통일되어 노동자 농민 등 프롤레타이아 중심의 지상천국이 되고, 그래서 다 같이 평등하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사회주의 역시 그 자체가 실상은 소수 지배층의 권력이기주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비에트제국도 지배자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서로 이기적으로 따로 놀다가 결국 붕괴되어버린 것 아닙니까. 중화인민공화국의 목하 최대 난제도 ‘빈부의 양극화’와 ‘지배층의 부패’ 문제 아닙니까.
따라서 좌우 양 진영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다 자기 안의 이기주의 그 타락한 정체성부터 먼저 바로 잡아야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먼저 그것부터 잡아야할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의 거장인 알랭 바디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이다.-
알랭 바디우의 철학적 성향이나 취향을 떠나서, 실인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 부모님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사랑, 남녀간 이성에 대한 사랑, 작은 이웃에 대한 사랑 등 모든 차원의 사랑의 적(敵)은 역시 이기주의입니다.
그런 진리는 저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먼저 갈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럴 것이 신약성경에, 사도 바울에 의해 이미 이렇게 갈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13:4-5)
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not self-seeking)’라는
말씀은, 달리 표현하자면 ‘이기주의가 아니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이기주의나 가족이기주의나 집단이기주의를 부인할 줄 알면서부터, 우리는 작은 이웃도 사회도 민족도 국가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나 그런 정파나 집단의 이익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자기만 애국자’처럼 나서서 막말을 내뱉으며 되레 대립과 갈등과 불화를 조장하는 그런 이념의 노예나 감정의 노예가 되지는 맙시다. 정치판의 들러리나 홍위병이 되지도 맙시다.
남이 보지 않는 골목길에서,
버려진 휴지나 꽁초 한 조각
조용히 줍는 것도 애국 애족이라고 그랬지요?
남이 보지 않는 소외된 골짜기인 ‘여리고’ 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은’ 듯 쓰러져 있던,
당시 사마리아인들과는 아예 상종하지도 않았던
적대파(敵對波)인 한 유대인의 불행을 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탄의 자식’이라고 질타하며
침을 뱉지도 고소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자 스스로 거룩한 종교지도자연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외면하고 지나쳐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되레 깊은 상처를 싸매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었습니다.
되레 미래적 비용까지 자원해서 감당하며 봉사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선한 사마리아인’에게는,
‘선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의 이름이 없습니다.
자기의 신분도 없습니다. 이기주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종’들에게는
‘자기’나 ‘이기주의’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메말라가는 살벌한 사회일수록,
이기주의가 비대해지고 막말과 욕설이 난무하는 거친 사회일수록,
인간의 각종 불안과 공허와 무의미 같은 실존주의적 절망의 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피차의 인성을 파괴하고 살상하는 악령(惡靈)의 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우리의 진정한 구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인간의 이기주의나 소유욕이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경제학자들의 지론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의 걸출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폴 틸리히의 지론이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생산성이나 경제성 역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의 한계’일 뿐입니다.
결국 ‘자기’ 혹은 이기주의라는 ‘한계’에 갇히고 만다는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까지 외친,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의
최대치라고 평가할 수 있는 대단한 철학자 니체의
그 실존적 용기의 한계 역시 '미치광이'로 끝나는 그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진정한 ‘존재의 용기의 원천’은 아니라는 것.
그렇습니다.
진정한 ‘존재의 용기(courage)의 원천’도, 정의(justice)의 원천도,
선(good)의 원천도, 사랑의 원천도, 능력의 원천도,
다 폴 틸리히의 지론처럼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초월된 유신론(有神論)’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언어나 세상의 문화에 갇힌 하나님이 아닌,
교리나 신학이나 학문 그 이상인,
심지어 '필연적으로 집단(*이기)주의적이거나
준집단주의적인 체제로 발전되는 교회' 그 이상인,
이른바 '하나님 위에 계신 하나님(God above God)'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
따라서 먼저 참 신앙인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론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구속사가 그렇게 이미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자기(혈기) 중심의 민족 운동에 치명적으로 실패한 후 사십 년 동안이나
도피자 신세로 살았던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 …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후, 비로소 ‘하나님의 온유한 종’의 모습으로
민족을 구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나선 것처럼 말입니다.
비겁하리만큼 유약했던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오순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만난 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세상을 구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나선 것처럼 말입니다.
완악하리만큼 율법이나 그 교리에 철저했던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예수가 세상에 오신 메시아 곧 구세주라는 복음을 증언 및 전파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나선 것처럼 말입니다.
‘강도 만나’ 허리가 남북으로 잘린 우리 시대의 인간이나 사회나 민족이
여전히 불행한 것은 직업종교인 내지 삯꾼목자 부류인
저런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생산성과 물질 만능을 역설하는 경제학자들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막말을 일삼는 우파나 좌파의 정객이나 논객들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 하나님께선 의인 한 사람 곧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예루살렘) 성읍을 용서하리라”(예레미야5:10)라고
말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이기주의를 극복한 한 사람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으면 그로 인해
창기처럼 멸시받고 버림받은 땅 사마리아가 또한 용서 및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간, 세대간, 빈부간, 계층간, 동서간, 남녀간, 이웃간 등
모든 '평화적 통일'도 성사될 것입니다.
숙제는, 그 '한 사람'이 바로 저나 당신이라는 데 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mercy)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10:36-37)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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