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그래도 지구가 돌아야 삽니다

이형선 2013. 8. 19. 11:04

 

기독교나 목회자들에 대한 ‘안티(anti)세력들’의

비판이나 비하나 야유의 수위가 높아지고 거칠어지는

세태 역시 어제 오늘의 일은 이미 아닙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비판세력들이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근주자필주(近朱者必朱)’라는 성어의 의미가 그렇듯이

‘붉은 것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기도 붉게 되어버린다’는 그것.

미운 시어머니와 거칠게 싸우면서 며느리의 심성이 

미운 시어머니의 성깔을 되레 닮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태복음7:1)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젊은 인터넷 세대일수록

그런 부정적 시류에 휩쓸려 선한 인간성이 익사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며, 부정적인 ‘비판력’보다는

큰 틀의 ‘분별력’을 키워 나가야할 것입니다.

 

 

물론 이미 ‘기득권을 누리는 부자신분’이 된,

일부 ‘배부른 기독교 지도자들’의 타락이나

세속화를 꾸짖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비판이자 비난이자 시류라고 저도 시인을 합니다.

그 스승을 보면 그 제자를 알고,

그 제자를 보면 그 스승을 안다는 의미에서,

저부터도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타락한 것은 아니잖아요.

신구약 말씀 자체가 타락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것만은 명확히 구별 내지 분별해 둡시다.

그래도 낮은 곳에는,

아직도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높은 곳에 줄을 대고 줄을 서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의 희망은 늘 낮은 곳에서 옵니다.

로얄 박스가 아닌, ‘마구간’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 나,

일대 일의 문제입니다.

중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와 나,

일대 일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실존적 환란이나 고통을 누구도

대신 앓아줄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시어머니가 너무 밉다고 해서,

시댁 족보까지 부정 내지 외면해버리는 사람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합니다.

그럴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또한 자기와 자기 자녀의 존재와 존엄성을  

살리는 유일한 족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물질 만능의 신자본주의적 가치와,

다양성이나 상대성 등 다원주의 내지

인본주의 중심의 사상을 강조하는 시대의 문화코드인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가 득세하는 세상일수록,

다른 한편으로 인생들은 태생적인 영적 공허함과

극심한 가치관의 혼돈과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이 시대의 인생들에게 ‘최후의 보루’인 교회는

과연 ‘구별된’ 구원과 희망의 길과 삶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이 설령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 내지 절망할 것은 없습니다.

‘안티세력’이 될 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삶이나 죽음을 막말로 기독교나 목회자가

대신 살아주거나 죽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남편이나 아내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나 어머니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자나 성녀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정체성은 실인즉

홀로 서야하는 ‘고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우리를 살리는 진정한

‘하나님나라’는 객체 그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소의 문제도, 눈에 보이는 소유나

그 가치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17:20-21)

 

 

그렇습니다.

적군과 아군 혹은 긍정세력과 부정세력

혹은 흑백논리라는 세상의 이분법을 떠나,

이것만은 거듭 명확히 분별해 둡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네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 나,

일대 일의 문제라는 것.

대속(代贖)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와 나,

일대 일의 문제라는 것.

사도 베드로의 말씀(*베드로전서2:9)에 근원을 둔,

‘만인제사장론(萬人祭司長論)’이 강조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골고다’라는 제단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 모든 죄인은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만날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개신교의 구원의 원리입니다.

 

 

세상이나 교회는 때론 오해하고 때론 타락해도,

인생은 서로 적대하고 서로 비난해도,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천천히 돕니다.

그래야 만물이 다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섭리의 비밀이자 영성의 비밀입니다.

그것이 또한 ‘공전(公轉)’이라는 큰 틀의 분별력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도 지구가 돌아야 삽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야 삽니다.

태양 곧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그 말씀(logos)을 중심으로

돌아야만 피차 죄인인 우리 인생들이 다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회전 내지 회개 자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을 구원하는 절대 길이자

절대 진리이자 절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원주의자들은 이렇게 비판 및 반문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성현(聖賢)들 중에서 예수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인

상대성 내지 상대적 존재일 뿐인데,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동서남북으로 많은데,

왜 ‘절대(성)’ 나 '유일성' 같은 독선적(?) 표현을 쓰느냐고.

그러나 어머니와 자식의 구원과 사랑의 관계는 다양한 것도,

남의 어머니나 자식과 비교 차원에서 오는 상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잘났든 못났든 오직 '내 자식'이고 '내 어머니'라는

절대성과 유일성의 관계가 거기 있을 뿐입니다.

거기서 '모성애'라는 헌신적인 사랑이 오로지 비롯됩니다.

말을 바꾸자면, 헌신적 사랑의 관계는 그렇듯 절대성과

유일성을 가진다는 것.

그런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10:14-15)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서의 헌신적 사랑.

선한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의 헌신적 사랑.

거기서 절대성과 유일성의 심오한 의미가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생’ 곧 ‘십자가’보다 더 큰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대신 죽음’보다 더 큰 사랑도 헌신도 없습니다.

‘부활’보다 더 큰 생명도 희망도 없습니다.

그 자체가 실존이란 현실의 세상에서 우리가

‘맛 본’ 구체적인 영적 사랑의 체험을 통해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비밀이자 안식(安息)의 절대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지구나 인생을 살리는 참 빛도 참 구원도 

지구나 인생 자체에게서 나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른 비 늦은 비처럼 오직 하늘에서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엄연한 창조 질서의 비밀이자

자연의 생존의 비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구가 돌아야 그래도 죄인들이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가 겸손하게 돌아야 그래도 우리가 산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짐은 쉽고

  내 멍에는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30)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