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추석 명절과 고인(故人)의 가장 간절한 소원

이형선 2013. 9. 11. 12:00

 

민족의 명절인 추석이 오면,

우리는 고향의 부모님을 위시한 어르신들을 찾아뵙거나

고인이 되신 부모님이나 조상의 산소를 찾기도 합니다.

모두가 부모님 내지 조상을 공경하는 미덕이자

선한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분은 당연히 찾아뵙고 효도를 해야겠지만,

저처럼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에는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할까요?

제 부모님은 제가 중1학년 때, 일시에 일찍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생전시 저에게 자주 하시던 제 어머니의 당부는 어머니의 친동생인, 

"외삼촌처럼 너도 법관이 되어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일그러진 제 삶은 청소년시절부터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일찍부터

되레 고민해야 하는 철학적 내지 신학적 숙제를 떠안아야했던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그때가 1962년이니까,

민족 전체가 여전히 전쟁의 후유증인 가난과 혼돈의 와중에

머물러 있던 시대이자 '먹고 살기에 바쁜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여하간 그렇게 이미 고인이 되신 제 부모님이 자식인 저에게 가장 간절히 원하시는 염원 내지 소원은 무엇일까? 여전히 제가 '법관'이 되는 것일까요? 하얀 쌀밥과 고기, 과일 등이 푸짐하게 차려진 산해진미의 제사상일까요? 묘소를 잘 관리하는 성묘나 그런 정성일까요?

명절이 닥치면 그런 생각을 새삼스럽게 다시 해보곤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언급하신 영적 세계의 단면이자 강조치인 '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누가복음16:19-)를 묵상해보곤 합니다.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대문에 누워’ 살던 거지 나사로.

그는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는’ 비참한 가난과 고통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죽습니다.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으로 가서 안식하고 있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거지 나사로’가 생전시 어떤 의(義)나 어떤 선(善)을 행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의 과거의 삶이나 행적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으니까 그것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여하간 그는 그렇게 낙원으로 갔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간 자격 내지 연유를, 주님께선 다만 “나사로는 살았을 때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는다”는 요지의 말씀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사로’라는 이름이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이다(God is my helper)’라는 의미이니까, 그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소망 가운데 살았다는 것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존재나 권위나 인격 내지 신앙인격의 대변일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주목해 보고 싶은 인물은 ‘한 부자’입니다.

그 후에 부자 역시 죽었습니다. 세상에서 남다른 축복을 받은 것 같았던 ‘부자’는 그러나 죽어서 낙원이 아닌 ‘음부(hell)’(누가복음16:23)로 갑니다.

심령이 불타는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는’ 저 ‘음부’ 곧 헬라어 ‘하데스’는 포괄적으로 ‘죽은 자의 거처’나 ‘사망’ 자체를 의미합니다만, 여기서는 낙원과 대비되는 이른바 ‘지옥(hell)’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육신의 죽음 이후에 선악간의 미래적 부활을 기다리는 중간기 상태이자 거처가 됩니다.

 

 

부자 역시 어떤 불의나 어떤 죄악을 자행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집 대문 앞에 누워 있던 거지 나사로를 볼썽사납다고 구박하며 야박하게 쫓아내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돌보지도 않았습니다.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말씀 그대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렇게 자신을 위해서는 호의호식하며 누리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지만 고통 받는 이웃에게는 무관심해다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세상의 실정법에 의하면 물론 죄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심법에 의하면 그렇게 큰 죄악이 됩니다. 여하간 ‘한 부자’는 그래서 ‘음부’로 갔습니다.

 

 

자, 여기서 핀트를 좀 바꿔봅시다.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죽어서 가야할 하늘나라의 저 ‘낙원’과 ‘음부(지옥)’입니다만 아무튼 먼저 고인이 되신 우리의 부모님들은 저 낙원이나 음부, 두 곳 중 어느 한 곳에 계실 것입니다. 고인이 되신 모든 분들의 영혼이 ‘나사로’처럼 낙원에서 평안히 안식하시기를 저도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 부모님의 영혼이 낙원에서 평안히 안식하시길 저도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저 ‘한 부자’의 경우처럼 그 영혼이 음부에 가있다면 그런 부모님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식인 우리나 형제자매들에게 가장 간절하게 원하시는 염원 내지 소원은 무엇일까요? 정녕 법관이나 부자나 권력자가 되는 것일까요? 떡이나 고기, 과일 등이 푸짐하게 차려진 산해진미의 제사상일까요? 산소를 깔끔하게 잘 관리하는 성묘나 그런 정성일까요?

 

물론 저도 저의 부모님을 추모 및 추도하고, 그것은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이자 미덕이지만, 그러나 고인이 되신 우리의 부모님들의 가장 간절한 소원은 그런 성공이나 정성이나 음식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음부’에 있는 ‘한 부자’의 가장 간절한 소원을 직접 들어봅시다.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누가복음16:28)

 

 

저 부자는 슬하에 친자녀는 없었든가 봅니다.

그래서 ‘내 형제 다섯’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 자식들’이 있었더라면 그 소원이나 그 간구는

‘내 형제들’을 위한 그것보다 더욱 더 간절했겠지요.

그것이 인지상정이자 부모님의 마음 아닙니까.

‘한 부자’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그들에게 가서 증언하면 ‘회개하리이다’,

그런 간절한 기대와 충정에서 그렇게 간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사로가 기적(奇蹟)을 통해

다시 살아서 세상으로 돌아가 증언을 하면,

세상에서 사는 ‘다섯 형제들’이 회개하고,

내세 곧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 합당하게 사는 진실한 신앙인격이 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16:31)

 

 

그렇습니다.

각색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들까지 살리는 등 무수한 기적을 행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역시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했던 모세나 선지자들의 증언 앞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과 원망과 패역을 일삼곤 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누구도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누구도 회개하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합니다. 모세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전한 것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영 곧 성령(聖靈)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 앞에서도 완악한 그리고 교만한 세상의 인생들이 다른 인간 누구의 증언을 듣겠습니까? 더군다나 ‘하찮은 거지’였던 나사로의 증언을 듣겠습니까?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게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hell)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말하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누가복음12:50)

 

 

그렇습니다.

고인이 되신 우리의 부모님들이 낙원에 계시든 지옥에 계시든, 세상을 사는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간절하게 원하시는 소원은,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하나님을 참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사는 신실한 신앙인격이 되는 그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효도이자 금세와 내세에 걸친 가장 복된 삶이라는 것을, 하늘나라에 계신 그분들은 그 영성(靈性)의 비밀을 이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기를 살다간 에라스무스도,

현대를 살다간 C. S. 루이스도 이런 말을 했지요.

 -이 세상의 삶은 내세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그것이 또한 저 ‘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강조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자 요약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삶은 내일을 준비하는 기간이고,

금세의 삶은 내세를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고통 받는 작은 이웃들에게 무관심하면서,

자기를 위해서는 사치하고   

‘호화롭게 즐기고’ 누리며 위세하는

이기주의 내지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다가 죽어서,

‘음부’로 간 저 ‘한 부자’의 삶을 선망해서도 안 되고

그런 전철을 밟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들을 귀’를 열어,

‘음부’에서 신음하는 저 ‘한 부자’의

가장 간절한 소원을 다시 들어봅시다.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