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 칼럼에서,
모 배우의 ‘연기에는 카리스마가 있다’는
표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만,
우리는 ‘남다른 자질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존칭어처럼 그렇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표현을 즐겨 쓰곤 합니다.
‘카리스마’에 대한 국어사전의 해설은 이렇습니다.
-①예언이나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초능력
②초인적인 능력(자질)-
저 ‘카리스마’는 신약성경의 원어이기도 한,
헬라어에서 나온 언어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은사(a free gift)’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은사(恩賜)’에 대한 국어사전의 해설은 또한 이렇습니다.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려줌, 또는 그 물건.-
이상의 의미를 묵상해보면,
성경의 ‘카리스마’에 대한 이해도 한결 빠릅니다.
그렇듯 카리스마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값없이 주는
은혜(은총)나 선물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내려주시는 은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여러 가지 은사’를 이렇게 분류했습니다.
순서대로 옮겨보자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distinguishing between spirits),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12:11)
문제는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에도 그런 영적 은사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무속종교인이나 불교인 등에게도 이른바 ‘영험(靈驗)한’ 은사는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알아맞히며 족집게처럼 집어내기도 하고, 예언도 하고, 때론 병 고치는 능력도 행사합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저 ‘영들 분별함’의 은사가 매우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영들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신적인 종교에 미혹을 당하기 마련이니까요.
대우주의 과학을 잘 아십니까?
‘과학을 많이 알면 무신론자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진실로 과학을 많이 알면 신학자 내지 신앙인이 됩니다. 비밀한 대우주의 창조와 질서와 그 운행의 무한한 섭리와 큰 지혜 앞에서 한계를 느낀 인간의 이성(理性)이 두 손을 들고 만다는 것입니다.
태평양 바다 한 구석에 떠있는 작은 섬에 사는 그것도 거기서 채 백년도 못살다가 죽는 존재인, 스스로 유식하다는 한 인생이 신(God)이 없다느니, 이 섬 외에는 생명체도 나라도 없다느니, 우주가 없다느니 운운하며 외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겠습니까? ‘우물 안 개구리’의 소음일 뿐이겠지요?
우리가 사는 지구는 대우주 속의 지극히 작은 하나의 행성일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한 세계가, 대우주의 비밀한 생명의 영역이 이 지극히 작고 좁은 ‘지구촌’ 한 곳에만 국한된 세계는 아닐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내세(來世)’가 있다고 믿습니다.
여하간 ‘영(靈)이신 하나님’은 대우주조차도 질서 안에서 운행하시는,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영적 무질서’ 역시 ‘성령의 세계’는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영적 세계를 ‘성령’과 ‘악령’ 그리고 ‘미혹의 영’ 등으로 그것을 분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런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 내지 표준은 한 마디로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한복음16:13-14)
그렇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입니다.
표준이나 푯대도 없이 제멋대로인 ‘악령’도 아니고,
‘미혹의 영’도 아닌, ‘말씀의 성령’이라는 것.
오직 ‘내 영광, 내 것’ 곧 희생양이 되어 대속(代贖)의 구원자가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사랑’으로 인도하는 그 영이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말씀 및 질서가 없는, 무속적인 영이나 미신적인 영은 그래서 ‘진리의 성령’이 아닙니다. 제멋대로인 악령 혹은 미혹의 영입니다. 그런 영의 열매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사랑의 열매도 아니고, 부활이나 영원한 생명의 열매도 아닙니다. 인간 자기의 영광이나 자기의 각종 탐욕을 구가하다가, 혼돈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허무한 열매를 맺을 뿐입니다.
문제는 ‘기독교’라는 이름 안에도, 영성세계의 비밀함이 늘 그렇듯이
스스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한’ 악령 내지 미혹의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한 시대를 ‘내로라’하며 크게 선동했던 '전도관(천부교)의 교주 박태선'이나 '통일교의 교주 문선명' 같은 사람을 실례로 들어 살펴봅시다. 저 사람들도 처음에는 정통 기독교를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이른바 신적 능력인 ‘카리스마’를 받습니다. 남다른 어떤 능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진리의 성령’을 받았으면, 저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과 사랑’을 증언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겸손한 종’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나 바울 등 사도들은 물론이고, 역대 순교자나 성인 성녀 등 수많은 신앙위인들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영적 교만에 빠져서, 인간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커져버립니다. 자기가 스스로 ‘신’이 되어버리고, ‘교주’ 내지 ‘재림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자기의 영적 교만이 그 제일 원인이겠지만 아울러 차라리 어리석은 추종자들이 그렇게 그들을 미화 및 신격화시킨 역사적 사례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악령의 역사이자 미혹의 영의 역사이자 그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확실하게 그것을 구별 및 분별해서 미신이나 맹신 같은 영적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한 진리인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한복음19;30)
숙제가 남았다면, 그것은 오직 ‘다 이루어진’ 신앙과 삶의 모범인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지 못하는 우리의 신앙과 삶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린도전서11:1)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가르치는 신앙과 삶이 가장 올바르고,
가장 복되고, 가장 겸손한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수천년에 걸쳐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로 주신, 수천년의 역사와 인생 선배들을 통해 이미 검증된 구원의 지혜이자 지식인 ‘다 이루어진’ 성경 말씀 앞에서 진실로 겸손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자기나 자기 가정이나 자기 집단이 진실로 복되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카리스마’를 받았다고 해서 임의대로, 입맛대로 가감(加減)해서 성경 이상의 ‘자기 말씀’이나 ‘자기 복음’ 내지 ‘자기 경전’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의 극치입니다.
그런 집단일수록 그 선동이나 조직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교주’나 ‘지도자’가 죽으면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추종자들을 책임지지도 못하고, 자기들만 ‘교주’ 내지 ‘왕(대장)’노릇하다가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하긴 세습까지 해서 대를 이어 집안이 행세하기도 하더군요.
여하간 분명한 것은 그들이 죽은 후,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한 사람도, 추종자들을 위해 ‘성령’을 보내준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세상에 남은 우리를 위하여, 진실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임의대로 “가감(加減)하지 말라”(요한계시록22:18-19, 신명기12:32)고 각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진실한 사랑일까요?
따라서 오늘의 기독교 교회 안에서도,
남다른 영적 은사 곧 카리스마를 받은 대단한 목회자가 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자기나 자기의 입맛에 맞도록 성경 말씀을 임의대로 가감(加減)한 ‘자기 복음’이나
자기의 세상적 탐심이나 정욕을 더 강조하고 합리화시키는 목회자라면 그 역시 스스로
이미 교만해져서 악령 내지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합니다.
만유의 창조자이자 주인이신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의 본질은 같습니다.
그 공의 내지 정의의 진리와, 거룩한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의 본질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오직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적인 교리를 강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첨단과학이 우주를 난다고 해서, ‘아버지의 아들과 그 피’라는 삼위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잎사귀’ 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및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믿는다는 사람들
특히 남다른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는 오늘의 기독교 목회자들이나
목회에 성공한 지도자들이 이미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에서,
이기적인 ‘자기가 그리스도보다 더 큰 자’가 되어 있다면 자기를 위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충심으로 그것을 회개하고, ‘처음사랑’을 회복하고,
끝까지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겸손한 종’으로서의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할 필연성이 또한 거기 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나 본질은 이기적인 축복이나 감정에 약한 대중 앞에서
인기스타처럼 남다르게 ‘많은 권능’을 행하며 '복을 파는' 자기 시위 그것 자체가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진솔한 공의와 헌신적인 사랑의 열매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5:22-23)
그럼 ‘악령의 열매’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만, 시기, 질투, 증오, 탐심 등 각종)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15:19-20)
우리가 지금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통해 맺고 있는 열매는 어떤 열매일까요?
성령의 ‘선한 열매’일까요? 악령의 ‘악한 열매’일까요?
우리 안에 일체(一體)가 되어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자 성령이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다면, 우리는 절로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열매’가 되어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주님께선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 및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7:20-23)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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