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인생의 '가장 소중한 발견'은?

이형선 2013. 9. 9. 11:06

 

오늘도 많은 환자들이

생살을 찢고 수술을 받지만, 그래도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은 채 수술을 받습니다.

전적으로 마취제 클로로포름 덕분입니다.

따라서 환자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마취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위대한 발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마취제를 발견한 인물은, 19세기 영국(스코틀랜드) 의사이자

에딘버그 대학 교수인 제임스 심프슨(James Y. Simpson)입니다.

만년의 어느 날, 그가 강의하기 위해서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의 생애에서,

  가장 가치 있는 발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학생들은 단연 마취제의 발견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심프슨 교수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가장 가치 있는 발견이자

가장 소중한 발견은 한 마디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그것입니다.

박학다식한 학자인 심프슨 교수의 겸손도 거기서 비롯되었고,

고통 받는 병자들 내지 이웃들을 그 고통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연민 내지 사랑도 거기서 비롯되었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도 오직 거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한 두 개 일화에 그치는 이벤트성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신앙교육을

받아온 그는, 깊이 있는 성경 연구를 통해 복음에 관한

전도용 소책자를 스스로 발간하기도 했던 인물이니까요.

그가 마취제를 발견 및 발명한 것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얻은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재우듯

  환자를 잠재워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무사히 수술을 끝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바로 구약성경의 이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세기2:21-22)

 

 

비밀한 계시의 말씀은 그렇듯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에게 역시 비밀한 계시적 지혜를 또한 줍니다.

영성의 비밀은 묵상 내지 관상하는 영성의 비밀과 통하고,

그래서 계시는 일상의 지혜로 발현되어

우리를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하니까요.

 

그래서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1:1-3)

 

 

주목할 것은,

구약성경의 율법 내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구속사의 주역인 ‘메시야’ 곧 ‘그리스도’와 만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선언하신 정체성처럼

그 분이 바로 ‘성경의 주인공’이자 ‘생수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 그대로

마침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묻는

그분 앞에서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화답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16:17)

 

 

그렇습니다.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발견이자 가장 소중한 발견인 영적 열림이나 이해는 세상의 ‘혈육’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내지 세상의 고도한 지성이나 지식이나 철학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주시는 구원의 길이자 은혜는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자체가 바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지는 믿음의 은혜를 받은 자는 그래서 진실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지금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체성 이해는 어떤 것일까요?

위대한 성현(聖賢) 중의 한 사람?

종교인 내지 도인(道人)중의 한 사람?

선지자 중의 한 사람?

물론 성현도 도인도 선지자도 다 저나 우리보다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구별 내지 분별해 둘 한계나 경계는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인 저들 역시 모두 ‘혈육’이자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그것입니다. 그들이 ‘의인’이라면 세상에서의 상대적인 ‘의인’일 뿐이지요.

세례 요한처럼 스스로 혹은 율법적으로 남다른 고행을 하고, 남다른 기인(奇人) 행각을 하고, 도를 닦는다고 해서 그것이 신(God)을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의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갈파하신 것처럼 그런 사람은 ‘여자가 낳은 자 중의 큰 자’일 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태복음11:11)

 

 

나름대로 깨끗하다고 생각했던 인간 내 방 안에 햇빛이 비치면,

평소에 전혀 보이지 않던 먼지나 티끌 하나까지도 선명하게 눈에 보입니다.

‘하나님의 현미경’으로 보면 온갖 세균들까지 득실거리고 있겠지요.

하나님의 참 빛이 들어오면 그렇듯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발견’에서부터 옵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등 행위적인 범죄만이 죄는 아닙니다. 성경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그것이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것, 말이나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는 것, ‘그리스도를 본받아’ 보다 헌신의 삶을 살지 못한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罪)’이자 ‘빚(debt)’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거액의 돈도, 대단한 지식이나 학문도, 기이한 고행이나 수행도, 훌륭한 성현의 인격이나 도리도 아닙니다.

오직 ‘내 죄’를 대속(代贖)해 줄 곧 대신해서 죽어줄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죽음으로 끝장이 나서도 안 됩니다. 죽음으로 끝나버리면 일회성 내지 세상에서의 대속 정도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의인이자 성현인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배(毒杯)’ 정도로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나 이성이나 세상과의 관계가 아닌, 그 이상인 초월적인 신(God)과의 관계에서 ‘영원히 산 자’ 곧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현재적인 증명이 또한 있어야 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나라가 하나로 이어지는 ‘부활(復活)’이라는 영원한 소망에의 확인이자 증명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우리네 인생 여정의 최고숙제이자 절대숙제인 그런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사건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경 말씀을 믿고, 겸손하게 묵상하는 자에게 그 영성의 비밀은 열려졌고, 열려지고 있습니다.

 

 

지금, 인생인 당신의 가장 가치 있는 발견이자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가장 소중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맨주먹으로 스스로 부자가 되었다는 자부심?

계층 이동을 통해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는 자신감?

사회적 주류(主流)로 정상에 섰다는 성취감?

대형 목회에 성공했다는 자기의 선민의식?

자력으로 수행 정진 득도했다는 의인 내지 도인의식?

 

 

남달리 열심히 사셨군요. 다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구별 내지 분별해 둘 한계 내지 경계는 있습니다. 그런 류의 ‘내로라’ 자기 자랑할 것이 많다면, 당신은 아직도 하체로 ‘여자가 낳은 자 중의 큰 자’일 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심령 안에 진리의 ‘참 빛’ 내지 ‘큰 빛’이 비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받지 못했다는 반증이 됩니다. 아직 자기 인생의 참 임자(主人) 내지 참 인자(人子)를 만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라는 것. 그럴 것이 참 임자를 만나면 사도 베드로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5:8)

 

 

저 ‘주(主)’ 곧 헬라어 ‘쿠리오스’는 ‘주인(主人)’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여전히 자기의 주인이고, 자기 자랑할 것이 여전히 많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인생의 수술대에 올라가서 다시 수술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마취제의 진가를 알라고, 저 심프슨 교수가 마취제를 안 놔주고 수술을 하겠지요. 생살이 찢어지는 몸부림 그 고난이나 고통을 액면대로 앓아본 자가 비로소 마취제의 진가도 알고, 대속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진가도 비로소 알게 되니까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한계를 사는 허무한 인간의 정체성 그 진면목에 제대로 그리고 올바로 열린 자는, ‘행인과 나그네 같은’ 인간 자기를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낳은 자’가 된 저 수제자 베드로도,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 바울도, 해박한 심프슨 교수도 이후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증언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지요.

우리네 인생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자기나 자기의 어떤 유형의 소유이든, 예컨대 자기 자식이든 재물이든 교회 등 공동체이든 자기가 그것의 ‘주인’이라고 주장 내지 자랑하는 사람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주님’ 곧 ‘주인(主人)님’이라고 고백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인 이른바 ‘노미널(nominal) 크리스천’일 뿐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참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하나로 통합니다. 저 사도 베드로의 고백이 그렇고, 저 심프슨 교수의 고백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또한 저 심프슨 교수의 겸손한 고백이 오늘 우리의 유일한 고백이자 유일한 자랑이 되는 것이고 또한 그래야만 하는 것이지요.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