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감수성이 예민한 그래서 상처 받기 쉬운 그들이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또래 친구들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나를 무시하는 말’, 그것이더군요.
물론 어른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일상처럼 때론 언어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때론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전혀 본의가 아닌, 예사로 하는 말을 통해서도
피차간에 오해가 생기고 그래서 시험이나 고통이나
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많이 있으니까요.
따라서 남이 ‘나를 무시하는 말‘에
당장 흥분해서 그것에 맞대응하기보다는,
먼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우리 인간의 성정으로는 늘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속어처럼 말입니다.
감정의 절제가 어려운 인간 우리 모두의 고민이 거기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신앙위인들이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와 능력의 도우심을 받으면
‘보다 더 큰 일’도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묵상을 좀 해봅시다.
영어로 ‘무시하다’가 ‘이그놀(ignore)’이지요?
그것은 남을 ‘무시하다’이지만, 아울러 남을 무시하는 내가 그만큼 ‘무식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형용사 ‘이그놀런트(ignorant)’는 사전의 해설 그대로 ‘무식한, 무지한’이 됩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무시하는’ 그 상대방은 실상은 그만큼 ’무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만큼밖에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못하는 사람인 거지요. 그런 사람을 탓해봐야 뭣합니까? 다섯 자 아는 자에게 열 자를 물을 수도, 요구할 수도 없잖아요? 실례되는 비유이지만 한 마디로, ‘개’가 당신을 무시하며 짖는다고 해서 탓해 봐야 뭣합니까?
상대방은 ‘개’가 아니고 ‘사람’이니까 화가 나는 것이라고요?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거룩한 성경’에서도,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개’나 ‘돼지’ 심지어 ‘독사’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개’나 ‘돼지’나 ‘독사’ 같은 인간 아닌 인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나 돼지나 독사와 맞붙어 싸운다면 더 어리석은 사람은 되레 당신입니다.
따라서 맞붙어 싸우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모르는 그것 그래서 ‘무식한’ 그것을 하나님이 알 수 있게 해주시기를 되레 위하여 기도하며 인내해야 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럴 것이 기도나 인내는 상대적으로 더 아는 자가 할 수 있는 여유이자 미덕이자 평안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대방의 그 ‘무지’ 내지 ‘무식’은 상식이나 지식이나 교양이나 당신의 진심 등을 알지 못하는 대인관계적인 유형 내지 범위의 것일 수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은 ‘영(靈)이신 하나님’ 그분의 진심과 그분의 말씀 등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그런 무지 내지 무식입니다. 거기서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을 알게 하는 참 인간 이해나 언어의 이해가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비밀을 잘 아시는,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every careless word)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태복음12:36-37)
‘무익한 말’이나 남을 ‘무시하는 말’을 조심해야 할,
종말적이고 심판적인 무서운 인과성(因果性)이 거기 있습니다.
악한 행동과 다를 바 없이, 무익한 말이나 거친 언어 자체에도 응분의 책임과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야고보서3:8)를 함부로 놀리는 것은 대상인 사람이 아닌, 하늘에 자기 죄악을 쌓고 있는 어리석은 행위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서둘러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자기가 자기를 미리 심판해버리는 행위이니까, 복된 기회의 부여이자 복된 방향의 전환이 됩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처절한 죽음의 고통의 와중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말로 온갖 조롱과 야유를 퍼붓고,
침을 뱉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무리들을 위하여
되레 이렇게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23:34)
저 ‘알지 못함이니이다(for they do not know)’의 헬라어 ‘우 갈 오이다신’을 부연 설명하자면, ‘알지 못하다, 보지 못하다, 깨닫지 못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무지하고 무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각 시대의 참 선지자들은 물론이고, ‘세상에 오신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그렇게 무시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린 것입니다.
나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위해, 우리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위해, 대속(代贖)의 기도를 하며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고통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고통 앞에서, 남이 우리를 ‘무시하는 말’ 정도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차라리 사소한 것이 아닐까요?
침소봉대(針小棒大)란 관용어가 있지요?
물론 바늘처럼 작은 것을 몽둥이처럼 크다고
‘심하게 과장하여 말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입니다만,
‘무시하는 말’이나 사소한 감정에 빠져 계속 잡혀있어도
그것이 자기를 때리는 몽둥이로 되레 커져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의 고뇌를 온통 홀로 짊어진 것처럼
고민하며 우울증을 앓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도 많아지는 거지요.
따라서 그런 시험이나 악에 빠져 계속
감정이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원수 갚는 큰 원한이나 우리의 생명 자체까지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소한 말이나 감정이나 고민이나 염려 등을 맡기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너무 ‘무식하고’ 그래서 너무 믿지 못하는 소아병(小我病) 내지 불신병(不信病)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부자도 있고
재물의 부자도 있습니다만,
모든 부자 중의 진짜 부자는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소유한 자입니다.
현자(賢者) 중의 진짜 현자는
만물의 지혜이신
하나님을 소유한 자입니다.
장수인(長壽人) 중의 진짜 장수인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소유한 자입니다.
'세상의 짝퉁'에 속고 사는 세월이 길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더 허무해질 것입니다.
오늘 당장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오 리는 오 리로 십 리는 십 리로’,
주고 받은 말이나 감정이나 거래 같은
세상의 문제가 대단한 것 같아도,
세월이 흐르다 보면 하찮은 일이 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분노했던 것이나
인색했던 것을 되레 후회하기도 합니다.
보다 참지 못하고, 보다 이해하지 못하고,
보다 배려하지 못한 것을 되레 후회하기도 합니다.
악의든 선의든 오해든 피차 하나님 및 예수 그리스도의
저 큰 마음이나 참 재물이나 참 지혜나 참 생명을
알지 못해서 또는 행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까요.
양심의 사람일수록 빈손으로 떠나야할
임종(臨終)의 순간을 맞이하면,
지난날 보다 많이 용서하지 못하고,
보다 많이 섬기며 사랑하지 못하고,
보다 많이 베풀며 배려하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를 진실로 살리는 소유는,
젊어서 죽든 늙어서 죽든
임종(臨終)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소유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소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과
베풂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진실로 살리는 말은,
젊어서 죽든 늙어서 죽든
임종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말입니다.
남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는,
구원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Ω)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이기주의가 아니고' (0) | 2013.08.08 |
---|---|
'땅보다 높은 하늘'의 시각과 가치관 (0) | 2013.08.05 |
지금 우리 안에는 누가 계실까요? (0) | 2013.07.17 |
모욕 비난 멸시 등의 돌에 맞을 때 (0) | 2013.07.15 |
어떤 보약 (0) | 2013.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