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모욕 비난 멸시 등의 돌에 맞을 때

이형선 2013. 7. 15. 09:56

 

이스라엘 왕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反逆)’ 세력에 밀려

왕궁을 떠나 정처 없이 피란길에 오른 시절이 있었습니다.

왕국의 내일을 전혀 기약할 수 없는 위태롭고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

다윗 왕은,  참담한 모습으로 추종하는 신복들과 함께

감람산 동편에 위치한 ‘바후림’에 당도합니다.

 

그곳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은 그리고 폐위된 전임 왕 사울과

그 집안의 혈통인 ‘베냐민 지파’ 영역에 속한 마을입니다.

시쳇말로, 정적(政敵)의 문중이자 지역 감정이 안 좋은 고을인 셈이지요.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인 시므이’란 사람이 불쑥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다윗을 향해 이렇게 저주하며 돌을 던져댑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사무엘하16:7-8)

 

 

물론 몰락한 왕족 가문의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인간적인 원한 및 감정을 토설하며 비난한 것일 뿐입니다. 제멋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 이름을 팔아서 다윗 왕을 정죄한 것입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시에 의해 왕으로 선택된 사람입니다. 인간적인 자기 야욕이나 피흘림이나 사악한 권모술수를 자행해서 스스로 왕위를 차지한 부정한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도 저 “가거라, 가거라(Get out, Get out)” 곧 히브리어 “쩨 쩨”는 ‘약속의 땅에서 꺼져라’, ‘가나안 땅에서 꺼져라’는 의미의 저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욕설이나 저주보다 더 큰 욕설이자 저주이자 비난이자 야유인 것입니다. ‘복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단절과 추방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억울할수록 더 분노하기 쉽습니다.

경호실장인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 장군이

감정을 감정으로 받으며 발끈 나섭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우리의 심통이나 포플리즘이 대개 그렇듯이, ‘정의의 이름으로’ 당장에 목을 베어버리면 시원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는 아닙니다. 우리가 부르짖는 '사회정의'도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차원입니다. 실정법 내지 율법의 한계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며 휘하들의 충동을 제지합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이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사무엘하 16:10-12)

 

 

공적으로 망신을 당한 치욕스런 사건 앞에서,

다윗 왕은 감정을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소인배인 인간 ‘시므이와 나와의 사건이자 관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배후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나와의 사건이자 관계’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인간적으로 역시 죄와 허물이 있는, 현실적으로 무능 무력해진 초라한 모습으로 피란길을  떠나는 다윗이 달리 도리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취한 영적 이해나 통찰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영적 이해나 통찰이나 진리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에 팔아서 죽게 만든 장본인은 유다입니다. ‘저주’와 ‘돌’을 던진 사람은, ‘죽음’을 던진 사람은 유다입니다. 그리스도를 시기하던 유대지도자들이자 로마총독 내지 그의 군사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인간 ‘유다와 나와의 사건이자 관계’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사건이자 관계’로 받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요한복음18:11)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후, 그 ‘죽음의 잔’을 의연하게 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지만 그러나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역시 그런 영적 이해나 통찰에 열린 그리스도인이었던,

미국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W. Mckinley).

그의 정치적 장단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그는 28세의 아나키스트 곧 ‘광신적 무정부주의자’였던 촐고츠가 쏜 총에 맞고 쓰러집니다. 1901년 9월 6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 후 사망합니다. 그는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촐고츠를 위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 사람을 너무 거칠게 다루지 말게.

  내가 죽는 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야.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이지.”

 

인간 ‘촐고츠와 나와의 사건이자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 나와의 사건이자 관계’로 의연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후 촐고츠는 물론 실정법의 판결에 따라 전기의자에서 처형되었습니다만, 여하간 오늘의 시대에서는 이미 ‘옛날사람’이 된 매킨리 대통령이나 다윗 왕의 정치적 성향이나 업적을 칭송하는 사람도, 비판하는 정적(政敵)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후세들은 저들의 저런 신앙인격을 높이 평가하고 배우며 저들을 기립니다. 저들은 죽었지만 저들의 신앙인격은 오늘도 ‘세상의 빛’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영육간의 ‘온전한 부활’ 내지 ‘신령한 부활’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렇듯 ‘신앙생명’이 ‘정치생명’보다 길다는 것. 육체의 생명보다 신앙인격 내지 신앙인품의 생명이 더 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오늘 누군가에게 모욕 비난 멸시 등의 돌에 맞을 때,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럴만한 뜻을 먼저 헤아려야할 것입니다.

다윗 왕이 그것을 하나님의 징계 내지 채찍으로 받아들이며 먼저,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본연의 음성을 듣고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곧 겸손한 회개의 자세입니다.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다윗 왕은 ‘저주를 선으로’, 되레 복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권능을 오직 의지했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에 기초를 둔 믿음과 소망을 간직한 것입니다.

그런 다윗 왕은 그래서 절망적인 위기에서도 미래적 소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말씀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태복음5:38-39)

 

 

과연 다윗 왕은 신앙위인입니다. 왕재(王才)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은 없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인 죄나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늘 ‘하나님 나라와 그 의’, 그 뜻을 먼저 구하며 살고자 했던 겸손한 신앙위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국의 왕으로서의 세상적 내지 대외적인 자기 체면이나 자기 권위보다 늘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높이며 경외(敬畏) 곧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 알았던 신앙인격입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나 사조직의 공작을 통해 자기의 비리나 사생활 등을 은폐시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공공연하게 자백하며 회개할 줄 알았고, 그래서 되레 용서 받는 은혜의 비밀도 복음의 비밀도 익히 체험하며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그렇게 다윗 왕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아니하고’,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오직 믿고 의지한 채 정처 없는 피란길을 묵묵히 갑니다.

시므이는 그런 다윗과 그 일행을 계속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면 먼지를’ 날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처절한 고통 속에서의 신음일 수 있는 다윗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다윗의 믿음과 소망을 오히려 이루어주셨습니다. 그의 ‘원통함을 감찰하시어 그 저주를 선으로’ 축복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과 그 일행은 ‘압살롬의 반역사건’이 진압된 후 무사히 왕궁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믿고, 전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자 전적으로 그 분의 손이 또한 그렇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구원이 되고, 선이 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12:19)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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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오시는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피터 마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