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형선 2013. 7. 1. 09:54

 

세계2차대전에 직접 참전했기도 했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

그는 그의 소설「아담, 네가 어디 있느냐?」를 통해

냉정하리만큼 객관적인 필치로, 전쟁의 무의미함과

전쟁을 앓으며 파괴되어 가는 인간들의 심성과

그 결국인 저주 같은 허무함을 때론 난해하리만큼

지적인 묘사를 통해 그려냈습니다.

 

 

소설은 독일군 주인공 파인할스가 전장에서 포격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되면서 시작하는데, 그것은 패전(敗戰)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독일군 전선에 대한 메타포일 수 있겠지요. 지루함과 무기력을 부상의 고통과 함께 신음하면서 병동의 독일군 병사들은 차례대로 죽어가고.

 

 

한편, 유태인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무참하게 처형당하는 유태인들. 그런 유태인 강제수용소의 지휘관 필스카이트는 그래도 ‘음악애호가’입니다. 그래서 수용소 죄수들 67명으로 합창단을 구성해서 음악을 즐깁니다.

다른 유태인들을 다 가스실로 보내 처형시킨 지휘관은 남겨둔 합창단원들도 죽여야 할 때가 임박하자, 그는 한 사람씩 불러 ‘최후의 노래’를 부르게 한 다음에 그들을 차례대로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그 첫 번째 상대가 일로나입니다. 파인할스의 연인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유태인 일로나는 ‘최후의 노래’로 성가(聖歌) ‘성모 마리아’를 부릅니다. 지휘관은 천상의 소리처럼 들려오는 그녀의 신비로운 영혼의 힘을 부정이라도 하듯 그녀를 향해 미친 듯이 총을 난사합니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승전국인 미군과 소련군이 독일 땅에 진주하기 시작할 무렵, 파인할스는 농민 행색으로 고향 땅으로 돌아옵니다. 전장에서 살아서 돌아온 것. 당분간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겠지만 틈틈이 기도하리라는, 하나님께 무엇을 원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까닭에 드리는 그런 기도를 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돌아옵니다.

 

 

고향마을.

그의 집에는 그의 아버지가 세워둔 ‘흰 깃발’이 유별나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한 기원일 수 있겠지요. 파인할스가 그런 집으로 막 들어서서 반갑게 부모님을 부르려는 순간, 한 독일군 패잔병이 패배에 저항이라도 하듯이 흰 깃발을 향해 미친 듯이 총을 난사합니다. 파인할스는 그렇게 동족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둡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어차피 전쟁 무대입니다.

생존경쟁의 무대이자 영적 전쟁의 무대입니다. 총칼 혹은 각종 죄악과 탐욕으로 인해 서로 죽이고 죽는 전장이라는 것입니다. 전장에서 죽은 자들도 허무하지만, 살아서 돌아온 자의 끝도 역시 허무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내일이면 늦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사도들의 표현처럼 ‘행인과 나그네’ 같은 인생이자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안개’ 같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 3:9)

 

 

창세기 당시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이자 금기의 말씀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2:16-17)

 

 

먼저, 우리는 저 ‘선악과’가 현재적으로 무엇이냐?

그것을 풀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선악과’ 문제는 ‘아담’ 곧 ‘사람’인 오늘 우리의 문제이자 금기이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저는 여기서 국내외 후학들에게 많은 영감(靈感)을 주었던 일본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해석을 빌리고 싶습니다. 그럼 ‘선악과’에 대한 이해가 훨씬 빠를 수 있으니까요. 그는 “각종 학문 곧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학 등 각종 세상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성경(말씀)은 먹지 말고 지키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 식으로 주석을 했습니다. 오늘의 ‘선악과’는 하나님의 계시의 집약이자 성취인 ‘성경(말씀)’이다 이거지요.

 

 

그렇다면 또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오늘의 ‘성경(말씀)’이라고 한다면, 역시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창세기3:22)는 또한 무엇이냐?

물론 창세기는 성령의 감동에 의한 고도로 상징적인 계시의 말씀입니다만, 구약성경의 예언 및 계시의 성취인 신약성경에 열리면 ‘생명나무의 열매’ 곧 ‘영원히 사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내 살을 먹고', ' 내 피를 마시라'고  나눠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인 구약의 계시의 비밀이 신약의 성취를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로 풀어지게 됩니다.

 

 

‘창세기’에 ‘선악과’를 먹으면 왜 죽는지 그 설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계시(啓示)’입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임금님이 보다 깊은 뜻이 있어 사랑하는 신하에게 금기(禁忌)를 줄 때 설명이 필요합니까? 아버지나 어머니가 장난감을 좋아하는 아직 어린 아들에게 날카로운 식칼을 가지고 놀지 말라고 금기의 말씀을 줄 때 설명이 필요합니까? 다만 순종이 필요한 명령일 뿐이지요.

 

 

오히려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임의적인 설명을 가하고

왜곡 내지 변질시키며 미혹한 자는 ‘뱀’ 곧 ‘사탄’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3:4-5)

 

 

자, 이제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사탄 내지 세상의 가감한 ‘말’을 따를 것이냐?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거기서, 성령 충만했던, 거듭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대적하는 유대인들 그 공회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말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사도행전4:19)

 

 

그러나 하와도 아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되레 사탄의 미혹의 말에 순종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버린 것. 그러자 그들은 사탄의 말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어’지기는커녕, 되레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타락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과 복된 사랑의 관계가 단절되어버린, ‘숨어사는’ 불행한 범법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래도 ‘내 자식’이기에, 하나님은 아담을 찾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세기3:9)

 

 

저 “네가 어디 있느냐(Where are you?)” 곧 히브리어 ‘아예카’는 물리적 ‘위치’를 묻고 있는 말씀이자, 아울러 심령의 ‘상태’를 묻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래적 존재의 문제, 유신론적 실존의 문제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숨어 있는 위치나 장소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실인즉 ‘영(靈)이신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단절되어버린 그 심령의 ‘상태’를 묻고 있는 우회적인 꾸중이자 관계의 회복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그때 이미 타락한 우리의 조상 아담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3:10)

 

 

그렇게 회복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탕자(蕩子)’가 그랬던 것처럼, 먼저 ‘죄의 원인’(누가복음15:18)을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가서’ 불순종한 죄악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어야할 텐데, 저 아담은 ‘죄의 결과’에만 연연하며 거기 사로잡혀있을 뿐입니다. 이미 사탄의 세력 곧 죄악의 결과인 ‘두려움’이나 부정적 사고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입니다. 영육(靈肉) 간에 ‘벗은’ 것도, ‘두려움’도, ‘숨은’ 것도 다 부정적이고 비본래적인 상태이자 위치입니다.

 

 

그렇게 아담은 계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나라’인 ‘낙원’에서 추방을 당하고 맙니다. 다만 죄와 불행과 살상과 죽음의 길을 가는, 짐승들처럼 허무한 인생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럴 것이 인간이 짐승들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했기 때문인데 그 거룩한 형상을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불순종함으로써 스스로 상실 내지 포기해버렸으니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요.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개개인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작가 하인리히 뵐은 저 소설을 통해 아담의 ‘위치’를 이렇게 답변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전쟁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상태’를 이렇게 답변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다들 미쳐 있습니다. 피차 짐승들처럼 죽이고 죽을 뿐입니다.’

 

 

다음은 우리가 답변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세상 역시 전쟁 무대입니다.

적군과 아군, 네 편 내 편의 전쟁 무대이자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전쟁 무대입니다. 당장에는 늘 ‘강한 자’가 이깁니다. 무력이나 간계나 야합이나 술수 등 온갖 부정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나 금력의 자리를 차지한 자가, 성공한 자가 이깁니다.

고인이 된 프랑스 전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런 ‘명언’을 남겼지요.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정치인이 한다.-

전쟁은 ‘전투로 하는 또 다른 정치이자 외교’라는 의미의 강조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영안(靈眼)이 열리면, ‘정치인’이 전쟁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교만이라는 것. 그들의 배후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찰했던 소년 다윗은 그래서 거장 골리앗을 대적하며 감히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사무엘상17:47)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말을 바꾸면, 이런 ‘명언’이 되겠지요.

 -전투는 군인이 하지만, 전쟁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렇습니다.

‘정치인’이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에는 이긴 ‘강한 자’의 승리, 그 생명이 오래 가는 것도 아닙니다. 보다 긴 역사관에 안목이 열리면, 결국에는 ‘의로운 자’가, ‘선한 자’가, ‘민초(民草)들’이 되레 이깁니다. 약한 자인 ‘온유한 자’가 되레 이깁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정이 그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의 야합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및 ‘최후의 승리’가 그랬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5:5)

 

 

그렇습니다.

그래서 ‘강한 자’인 히틀러도 죽었고, 독일군도 일본군도 패전했습니다. 스탈린도 죽었고, 소비에트 제국도 망했습니다. 공룡이나 맘모스 같은 ‘강한 자’는 이미 사라졌고, 되레 양이나 토끼 같은 ‘온유한 자’ 곧 약한 자나 선한 자가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정의이자 선(善)입니다.

그것이 ‘오래 참으며’ 역사를 주관 및 섭리하시는 ‘영(靈)이신 하나님’의 심판이자 ‘최후의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종말적 승리도, 내세적 승리도 그렇게 긴 하나님의 안목과 ‘오래 참는’ 섭리에서 올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전쟁은 대외적인 것은 물론이고 대내적인 생로병사(生老病死)까지를 포함해서 실인즉 ‘영적(靈的) 전쟁’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만, 세상에서 살아도 이기고 죽어도 부활을 통해 이길 수 있는 영적 전쟁이라는 것. 인생사의 모든 전쟁은 ‘최후의 전쟁’에서 이긴 자가 진정한 승자입니다. ‘최후의 전쟁’에서 지면 대단한 과거의 승리도 부귀영화도 솔로몬의 ‘허사가(虛事歌)’가 그런 것처럼 ‘헛되고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무엇에 사로잡혀있는 것일까요?

미쳐있는 것일까요? 돈? 권력? 명예? 주색? 도박? 살상?

‘사탄의 세력’인 탐욕이나 정욕, 두려움, 분노, 증오나 원한, 시기 등의 감정이나 죄악에 사로잡혀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는 반증이 됩니다.

 

 

 -아담아, 아담아.-

그렇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지금 들리십니까?

눈을 감으니까 들리신다고요? 무릎을 꿇으니까 들리신다고요? ‘들을 귀’가 살아있군요. 다행입니다.

그럴 것이 아예 ‘귀’가 막혀버린 완악한 사람들도 많고, ‘귀’를 막아버린 교만한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다 싶으니까요. 그래 봤자 스스로 불행한 길을 자초하는, 허무한 길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일 뿐인 것을.

 

 

오늘의 자리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구원의 해법입니다.

계시된 구원의 비밀이자 영성(靈性)의 비밀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복락원의 길 및 하나님의 나라(天國)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구원의 해법을, 의외로 간결하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복음4:17)

 

 

그렇게 용서하고 구원하는 신약성경의 역사가, 장차 세상에 오시리라고 구약성경에 예언 및 계시되어 있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회개’를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인생 우리를 사탄(惡靈)의 타락과 불행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첫째 아담’이 아닌, 구원과 행복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둘째 아담’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福音)’ 곧 ‘복된 소식’입니다.

따라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올바르고 확실한 답변이자 현재적인 답변은, 한 마디로 이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나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4:17)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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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은 모든 전쟁에서

   패할 것이다.

   최후의 전쟁을 빼놓고는.-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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