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너무 이기적이거나
독선적일 만큼 ‘무례하다’거나 ‘뻔뻔하다’거나
‘교만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적잖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면목에서는 오해이기를 바라지만,
여하간 그럴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말씀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언급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누가복음18:9-10)
예나 지금이나 저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토색(討索)’이나 ‘불의나 간음’을 행하지 아니하였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감히 기도 및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인이라면 그런 사람은
실로 경건한 신앙인이자 윤리적으로도 의로운 사람입니다.
적어도 인간인 우리의 사회적 평가 기준치나 가치관에 의하면 말입니다.
실인즉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는 신분이었고,
시쳇말로 ‘성공한 인물’들이었습니다.
대형교회를 위시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오늘의 목회자들이나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거나 화려한 외양 같은
그런 ‘겉사람’의 모습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고’
그 ‘속사람’ 중심으로 인간을 평가하시는
하나님 및 예수 그리스도의 견해나 가치관은
인간 우리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인간 우리의 평가와는 되레 정반대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God, have mercy on me.)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18:13-14)
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곧 헬라어 “힐라스데티 모이”는
‘은혜를 베푸시어 구원(구속)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은혜’가 뭡니까?
전혀 그럴만한 자격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전적 은혜’가 뭡니까?
100% 전적으로 의지하는 데서 오는 하나님의 자비 내지 긍휼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축복을 받고 성공한 자가 자기 자랑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작금의 시대에는 위조나 과장이나 허세라도 부려서
자기 자랑이나 자기 광고를 많이 해대는 사람이 행세하는 시대입니다만,
세상에서 자기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그 성공한 신분이나 학식이나 명예 등의 자랑거리가
되레 자기 걸림돌이 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들이나 약한 자들이나 미천한 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구원을 받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되레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도이자 성자였지만 세상 끝날까지, 순교 당하기까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며 산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죄인’인 인간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바른 경외의 자세이자 겸손한 태도이자 기도이자 고백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렇고,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되어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 연륜이 쌓이고, 사회적으로 이른바 ‘성공을 하면’ 그런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이 스스로 ‘바리새인’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그것입니다. 스스로 ‘의인(義人)’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래서 더 겸손하게 더 덕이 있는 모습으로 더 많은 사람을 더 많이 섬기기는커녕, 직분이 계급이 되어 되레 '무례하게' 남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거나, 쉽게 정죄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스스로 ‘교황’이 되거나, ‘교주’가 되거나, 심지어 자칭 ‘신’이 되어버리는 경우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자기가 대형교회에 성공한 목회자라고 한들, 신학박사 내지 성경학박사라고 한들, 한계를 사는 인간인 우리 주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면 뭐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 안에서, 역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부분적으로'(고린도전서13:12) 아는 것일 뿐이지요.
블레즈 파스칼이 그랬지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고,
하나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다.-
과연 명언입니다.
그런데 객기(?)가 허락된다면,
저는 파스칼의 저 명언에 이런 수식어를 덧붙여보고 싶습니다.
-‘처음 마음을 잃지 아니하고 끝까지 겸손하게’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다.-
그럴 것이 세상에서 이른바 ‘목회에 성공’했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처음 마음’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의인 행세를 하는 그런 영적 교만에 빠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불행해집니다. 나아가 그 집단이나 그 신앙풍토나 그 사회가 불행해집니다.
태생적으로 정체성 자체가 ‘죄인’인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리 선행 혹은 수행을 많이 하고, 헌금이나 기부를 많이 해도, 그런 자기의 공로나 공적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 것도 세상에 가지고 온 것이 없는,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주제에 스스로 선행이나 기부를 했다면 뭐 얼마나 했겠습니까? 막말로 공동체인 사회의 것을 남달리 챙겨서 그것으로 그것을 준 사회에 환원하는 것 아닙니까?
흙인 제가 죽어서 흙이 된다면 그것은 당연한 환원이지 그것으로 땅 앞에서 행세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 모든 세상의 것은 결국 허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별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코람 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라는 우주적 시야나 양심이나 가치관에 열리면, 인간 자기의 성공한 신분도 선행도 고상한 수행도 스스로 의인이라고 행세할 수 있는 공적거리는 못됩니다.
당연히 죽어야 마땅한 죄인인 저나 죽어도 골백번은 죽어야 마땅한 죄인들인 인간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 저 제단에서 대신 죽으신 ‘속죄양’ 곧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일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 및 예배드릴 수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신분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계시해주신 ‘영(靈)의 비밀’이자 심오한 ‘구속(救贖)의 비밀’이자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따라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끝날까지 겸손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저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의 은혜 없이, 속죄양인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 스스로의 행위로 의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주여 주여’ 외어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나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피’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한 세상 끝날까지 ‘일만 달란트’라는 그 ‘은혜’에 ‘빚진 자’로서의 겸손한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이고, 사람(이웃) 앞에서도 말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의 자세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런 우리의 기도에 '성 어거스틴'은 오늘도 이렇게 화답합니다.
-의인되어 교만한 것보다,
죄인되어 겸손한 것이 낫다.-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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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은 다른 모든 죄가
자라나는 기반이자,
그 생성의 근원이다.-
*윌리엄 바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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