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큰 새의 욕심'과 장자(莊子)의 탄식

이형선 2013. 6. 10. 09:36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는

물론 생존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싶은 사람이나 사회일수록

돈이나 각종 탐욕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실인즉 자타가 공인하는 세기적인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조차도 ‘돈의 노예’로 살 때는,

그 소유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가 “조금만 더(Just little more)”라고

대답했던 일화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이 딱히 돈이나 재물에만 국한된 욕심이겠습니까?

인간 우리의 육체적 물질적 출세적인 세상 각종

탐욕이나 정욕에 대한 모든 욕구가 역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세상의 ‘바닷물’은 마실수록 더 갈증이 납니다.

바닷물을 채우는 ‘하늘의 비밀’을 알기 전까지는

마실수록 갈증이 더 납니다.

 

 

작금의 기독교 신앙풍토를 포함해서 사회적 내지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지도자들이 돈 문제,

성 문제, 학위나 논문 문제 등에 얽힌 비리로 인해

비판의 대상으로 추락하는 사례나,

고위직 인사 검증에서 낙마하는 인사들이나,

이른바 ‘성추문’ 사건으로 인한 청와대 대변인의 낙마 등

‘잘 나가던’ 인물들의 부침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생각과 함께 절로 공감하게 되는 것은

‘장자(莊子)의 탄식’, 그것이었습니다.

 

 

장자(莊子)의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우화의 의미를 다시금 조용히 음미해봅시다.

장자가 조능의 밤나무숲 울타리를 거닐다가

‘큰 새’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봅니다.

그 새는 날개너비가 7자요, 눈망울이 1치나 되는 거물입니다. 날개너비가 2미터를 넘고, 눈망울이 3센티미터나 되는 새. 그런데도 그 새는 눈이 어두워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듯 장자의 이마까지 스치며 밤나무 숲에 앉습니다.

 

 

의아해진 장자가 중얼거립니다.

  “저 놈은 도대체 어떤 새이기에

   저렇게 넓은 날개를 가지고도 높이 날지 못하고,

   저렇게 큰 눈을 가지고도 앞을 잘 보지 못할까?”

 

 

장자는 그 새를 잡고자 뒤에서 노려보며 화살을 겨눕니다.

그때,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니 그 ‘큰 새’는 앞의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사마귀를 잡아먹기 위해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마귀’ 한 마리를 잡아먹고자하는 욕심 때문에 눈도 어두워져 있었고, 높이 날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 사마귀 역시 앞에 있는 ‘매미’를 잡아먹기 위해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매미는 그것도 모르고 마냥 제멋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은 장자.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호라, 모든 일에는 이로움(利)과 해로움(害)이

   서로 얽혀 있나니 욕심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로고!”

 

 

그런 장자는 그 ‘큰 새’를 잡으려는 욕심과 화살을 버려두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벗어납니다. 바로 그때, 그런 장자의 뒤에도 그를 밤(栗)도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잡고자 뒤에서 노려보고 있던 눈이 있었습니다. ‘밤숲지기’입니다. 그가 거친 욕설을 퍼부으며 장자의 뒤를 쫓아옵니다. 가까스로 도망쳐 위기를 모면한 장자는 집으로 돌아온 이후 ‘석 달’ 동안이나 뜰 앞에 나앉지도 않습니다.

 

 

먹이사슬에 얽매인 삶.

깨달음의 세계가 큰 현자(賢者)인

장자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눈 앞의 먹이나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주색 같은

탐욕에 사로잡히면 사람인 우리 역시 눈이 어두워져서

뒤는 물론이고 앞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

날개는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날개가 있는 것들에게 추락이 있습니다.

‘큰 새’의 추락일수록 그 부정적 파장은 큽니다.

날개는 하늘을 날아라고 주어진 은혜이지,

땅에 집착하라고 주어진 은혜는 아닙니다.

땅의 이해(利害)에 얽히면 추락이 올뿐이니까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12:5)

 

 

그렇습니다.

천하를 다 얻었다 쳐도

‘사람의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허무의 무게나 부피만 더 무겁고 클 뿐이지요.

그래서 천하의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솔로몬 왕도 이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도서5:10-11)

 

 

그렇습니다.

부자라고, 권력자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언급하신 ‘일용할 양식’ 그 이상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실인즉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외에 유익한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행세’조차도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들의 백합화)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태복음6:29)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가치관을 본받으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대단했던 그의 학문도 명예도 가문도, 로마시민권 같은 로얄박스나 권세도 다 '배설물'처럼 버려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체하지도, 행세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세상의 무대는

여전히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지배하고,

강자의 그 권세와 그 먹이사슬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거물인 ‘큰 새’도, 현자인 ‘장자’도

그 생명을 자기 스스로 구원 내지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저 ‘큰 새’나 ‘사마귀’ 같은 동물의 집착은 먹고 살아야 할 ‘일용할 양식’ 차원의 욕구이기에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새’를 잡고자 뒤에서 노렸던 장자의 집착은 ‘일용할 양식’의 욕구가 아닙니다. 그 이상인 욕심 내지 탐욕입니다. 날짐승인 ‘큰 새’보다 더 어리석은 인간 우리의 욕심이자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탐대실(小貪大失)의 함정에 쉽게 빠지는 우리 역시 내일의 일을, 내일의 생명을 전혀 모릅니다. 도적 누명을 쓴 채 밤숲지기의 욕설을 받으며 줄행랑친 장자가 그 후 집에서 ‘석 달’ 동안이나 칩거하며 자탄 및 참회(?)했던 이유도 거기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우리의 포지션은 어느 쪽일까요?

매미? 사마귀? 큰 새? 장자? 밤숲지기? 그 뒤엔?

장자가 본 저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입니다. 육안(肉眼)으로 한계를 보았을 뿐입니다. 물론 육안 내지 심안(心眼)이 장자처럼 크게 열리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나 육안이나 심안은 크게 열려도 그 후 ‘석 달’ 동안이나 스스로 은거하게 만듭니다. 인간 내지 세상 지혜나 그 깨달음의 한계에 갇힌다는 것. 그것은 ‘두려움’일 수는 있어도 ‘자유’는 아닙니다. 따라서 ‘장자의 탄식’처럼 ‘탄식’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저 모두의 뒤에 계신 ‘눈에 보이지 않는 눈,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열리는 그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영안(靈眼)에 열려야 한다는 것. 인생인 장자는 물론이고 곤충인 매미까지 포함한 저 모든 만물의 생명도 죽음도 오직 거기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누가복음12:5-7)

 

 

“두려워하라”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같은 문맥에서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자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살든지 죽든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길이요 진리’ 자체이신 그래서 ‘자유’ 자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을 얻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그랬지요?

그렇습니다.

참 길에는 문이 없습니다.

큰 길에는 문이 없습니다.

늘 우리 앞을 가로막는

두려움의 문도 없고,

늘 우리 시야를 어둡게 하는

어리석은 욕심의 문도 없고,

빗나간 정욕의 문도 없고,

시기나 증오의 문도 없습니다.

휴게소처럼 문이 있다면,

그것은 회개의 문이나 용서의 문이겠죠?

그런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그런 우리의 ‘그리스도의 길’이 될 수 있기를!

 

 

 

 

                                                         (Ω)

 

 

 

 

 

 

--------------------------------------------

 

 

 

 

 

 

       (♣)

 

 

 

 

  -세상에서 번민 없는 사람은 없다.

   번민은 우리의 욕심에서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다행히도

   그 이상으로

   강한 것을 또한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욕심보다 약하다면,

   세상에서 정의의 길을 좇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성 어거스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