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초패왕 항우와 이스라엘 왕 사울의 등극과 전락

이형선 2013. 5. 27. 10:01

 

오늘의 시대에도 놀음놀이인 ‘장기(將棋)’를 통해서

한(漢)나라와 초(楚)나라의 싸움은 ‘장군 멍군’ 계속되고 있는데,

각각 상대의 수장인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승패 내지

입신과 좌절이라는 영욕의 부침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15세 연상이었던 유방과 천하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초패왕(楚覇王) 항우는 4년여에 걸친 70차례 전투에서 패배를 모른 채 연전연승을 거듭하지만, 그러나 기원전 202년 겨울에 있었던 해하에서의 전투에서 일생일대의 패전을 합니다.

이기고 지는 일은, 한두 번의 실수나 실패는 ‘병가상사(兵家常事)’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그래서 오만하리만큼 자만심이 가득했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는 그 한 번의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해버립니다. 31세였습니다. 단 한 번의 패배가 인생을 마감하는 패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패배나 고난에 대한 이해의 여유나 면역성이 전혀 없었던 때문이었겠지요.

 

 

패전한 항우는 몸마저 십여 군데 상처를 입은 채 한나라 군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가 장강 기슭인 오강(烏江)에 당도했을 때, 그래도 살 기회는 있었습니다. 항우 역시 장강을 건너 그리던 고향이 있는 동쪽으로 달아날 생각이 있었습니다. 항우를 아끼는 뱃사공까지 거기 있었는데 그 사공이 이렇게 권고합니다.

   “강동(江東)의 땅은 넓지는 못합니다만 그래도 사방이 천리요 인구도 수십만을 헤아립니다. 거기로 가시면 다시 한 번 기회를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자 어서 배에 오르소서. 배는 이 한 척 뿐이오니 한군이 뒤쫓아 오더라도 강을 건너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자책감 내지 차라리 오만한 자존심 때문에 배에 오르지 못합니다.

   “강동은 내가 그곳 젊은이 8천명을 이끌고 처음으로 거사한 곳인데 그 8천명은 다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았소. 죽은 젊은이들의 가족이 설령 나를 반겨준다 하더라도 무슨 면목이 있어 그들을 대할 수가 있겠소. 그들이 나를 용서한다 해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가 없소이다.”

그래서 항우는 방향을 돌려 최후까지 한군과 맞서 싸우다가 기진해지자 자기 칼로 자기 목을 쳐서 죽습니다. ‘하늘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탓할 뿐, 인간 자기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자기의 실패를 인정하지도 못했고 그 실패를 통해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던 ‘천하호걸 항우’. 그래서 역사는 또한 그를 ‘지혜가 부족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합니다.

 

 

그는 초나라 귀족 출신이자 천하의 영웅이었지만 독불장군 같은 오만함 때문에 남을 인정하거나 배려할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충성하고자 했던 진평, 한신 같은 당대의 인물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홀대합니다. 그러자 저들은 결국 항우의 곁을 떠나 유방의 휘하에 들어가서 되레 항우를 대적하는 모사와 적장이 됩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자 달리 배운 것도 없는 미천한 건달 출신이었기에 그래서 되레 겸허하게 남을 인정하고 배려하며 공동선을 이루고자 했던, 보다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 때론 자기를 배신했던 사람들조차 용서하고 포용했던 유방의 인간 경영과는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물론 견해를 달리해서, 유방은 ‘간웅(奸雄) 조조’처럼 현실 정치에 교활하리만큼 능한 처세의 달인일 수도 있고, 초패왕 항우는 차라리 우직하리만큼 이중성이나 가식이 없는 인간형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요.

 

 

여하간 천하 호걸 항우는 그렇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자살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과연 패전에 책임을 지는 ‘영웅다운 죽음’이었을까요? 역사의 평가가 결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杜牧)은

그의 시 <제오강정(題鳥江亭)>의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승패란 병가에서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니,

 부끄러움을 안고 참을 줄 아는 것이 사나이라.

 강동의 젊은이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왔다면

 어찌 되었을까.(捲土重來未可知)-

 

 

바로 저기서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유래되었습니다.

‘어떤 일에 실패한 뒤에 힘을 가다듬어 다시 시작함’이 그 사전적 의미입니다.

 

항우도 입신 초기엔 사람됨이 좋았다고 합니다.

타고난 거구에 용맹을 겸비한 호걸이었기에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하면서 그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고, 무력 내지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의 재미에 의해 속화되면서 그는 점점 오만해지고 포악해집니다.

그래서 진의 수도 함양의 궁실과 각종 서적들을 불태웠고, 무고한 아녀자들을 대량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천심(天心)도 아울러 민심(民心)도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항우는 그런 자기의 악행과 스스로 큰 자라고 생각하는 교만이라는 그 죄악이 자기의 발목을 잡아 ‘권토중래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성경적 언어로 비약을 시키자면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국 ‘하늘’의 버림을 받고만 것입니다.

 

 

한편, 저는 저 초패왕 항우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등극과 전락의 역사를 주의 깊게 읽고 거울로 삼았더라면,

‘하늘의 뜻’ 곧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닫고

그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싶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것이 두 왕의 삶의 행태에 나타난

영욕의 부침과 죽음에는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초패왕 항우는 기원전 3세기 인물입니다만,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기원전 11세기 인물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당대의 선지자이자

민족 지도자인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이 일개 서민인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그러자 사울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사무엘상9:21)

 

 

그는 ‘구 척’ 장신이었던 호걸 항우처럼,

‘키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한’ 장신이었고

‘준수하게’ 생긴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가장 작은’ 지파이자

‘가장 약한’ 집안 출신인 것을 잘 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간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잘 아는 겸손한 신앙 인격이었던 것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그렇게 겸허한 사울을 데리고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그를 왕으로 옹립합니다. 사사들(Judges)이 통치하던 시대가 끝나고, 신정(神政)국가인 이스라엘에 왕정(王政)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왕좌에 오른 사울은 그러나 그 후 날로 교만해집니다.

적군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불안한 상황에서 성전(聖戰) 및 승전을 위한 제사의식을 거행하고자 하는데, 제사장인 선지자 사무엘이 ‘정한 기한’에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더욱 불안해진 백성들이 동요하며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민심이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 왕은 그럴수록 의연하게 더 오래 참는 신실한 믿음과 더 겸손한 믿음의 모범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되레 성역(聖役)에 대한 패역의 모범을 보입니다. 자기가 대제사장인 사무엘의 역할을 대신해서 제사의식을 집행해버린 것입니다. 신성한 제사의식조차 자기의 편리 내지 임의대로 정치적으로 집행해버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정국가 곧 신본주의국가의 왕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망령된’ 월권 행위이자 독성(瀆聖) 행위입니다.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청와대의 대통령이 그 정치권력으로 교회나 성당에서의 신성한 예배의식조차 임의대로 형식적으로 집행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사울 왕은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는, 교만한 인본주의 정치권력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온’ 선지자 사무엘이

이렇게 사울 왕을 책망하며 폐위를 예언합니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사무엘상13:14)

 

 

그러면 겉옷이라도 찢고 회개하며 자숙했어야 했는데, 그 후 사울 왕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또 임의대로 거역해버립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그럴만한 영적 순결을 위한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울 왕은 그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사울 왕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사무엘상15:9)

 

 

그렇게 그는 그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에 되레 더 큰 패역의 죄를 짓습니다.

그러자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합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그런 지경인데도 전장에서 돌아온 사울 왕은 승리감에 도취한 채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렇게 자랑스레(?) 말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가장 좋은 양과 소 등을 남겨왔노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한 술 더 떠, 전리품(戰利品)이라는 자기 업적의 과시욕 내지 물욕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까지 팔며 악용한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스스로 큰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처럼, 그럴만한 영적 순결 내지 순종을 위한 필연적 이유가 있어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어버린 것. 그 결과는 역시 '실낙원'이었습니다.

그런 사울 왕에게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리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명언과 함께 이렇게 최후의 폐위 선고를 내립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15:23)

 

 

그렇게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르고, 하나님의 이름이나 권위를 제멋대로 무시한 왕이자 타락한 정치권력이었던 사울 왕은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만 것입니다. 그런 그의 인간 자기중심의 극도로 타락한 정권욕는 그 후 하나님의 종인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85인을’(사무엘상 22:18) 죽여버렸던 ‘놉 제사장 학살 사건’을 통해서 더욱 여실하게 증명됩니다. 그렇게 당대의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악을 자행한 것입니다. 초패왕 항우가 각종 서적들을 불태우고, 무고한 아녀자들을 대량 학살한 것도 그런 맥락의 악(惡)이 되겠지요.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2:19)

 

 

그렇습니다.

남이 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인즉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죄악과 허물이 나를 심판합니다.

우리의 죄악과 교만이 우리를 심판합니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다”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敬畏)할 줄 모르는,

곧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고,

그 자체가 인생 우리의 가장 큰 고통이 되고

그 자체가 인생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이 됩니다.

따라서 그런 ‘영(靈)의 비밀’에 열려져서

집행자이신 하나님이 심판을 집행하기 전에

미리 회개하는 자는 진실로 복이 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요나단을 위시한 세 아들을 잃고,

자신마저 ‘중상’을 입은 채 도주하다가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려지매’(사무엘상31:4)

죽습니다. 초패왕 항우처럼 자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좌는 그 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다윗 왕과 그 집안에 의해 계승됩니다.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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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과 성경 없이 세상을

 올바로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지 워싱턴(미국 초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