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지방 도시의 고교생들이
‘봉사활동’을 하러 간 노인시설에서
병상의 할머니에게 막말과 반말을 했던
이른바 ‘패륜 동영상’에 관한 뉴스가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미성년자이기에 담배를 팔지 않겠다는
70대 어르신을 얼굴에 멍이 들도록 십여 차례나
주먹으로 때린 소년에 관한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어른들, 청소년들, 아이들 세계를 막론하고
거친 ‘언어폭력’과 ‘패륜’으로 인한 가해와 피해의
수위가 날로 높아지는 이 시대의 세태입니다.
실인즉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일상처럼 언어폭력의 가해자로 살기도 하고,
그 피해자로 살기도 합니다.
성장하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이 그렇듯이,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같은 청소년의 심성일수록
매나 주먹으로 맞는 물리적 폭력보다
무시 내지 멸시 및 조롱을 당하는 ‘언어학대’나
‘잔소리’ 같은 언어폭력이 더 깊은 상처가 되어
더 오래 남습니다.
가해자가 부모님이든 선생님이든 말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말 한 마디’라는 돌멩이를 맞고
아예 죽어버리는 ‘개구리’까지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른 내지 기성세대라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언행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 ‘우리의 죄’를
먼저 회개해야겠지요.
나아가 더 큰 문제는, 학자들의 심층 연구나 각종 통계에 의해서도 입증되는 바처럼, 폭력적인 가정이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거기서 배운 피해자로서의 그 언어폭력이나 폭행을 예사로 답습해서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그들이 어른이 된 이후에도 그것을 가해자로서의 폭력으로 재생산해서 대물림까지 한다는 데 있습니다. ‘세 살 때 배운 버릇 여든 살까지 간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말입니다.
또한 조부 조모 등 삼대 이상이 오순도순 함께 살던 가족이라는 전통적 공동체나 자연을 통해 선한 인성(人性)을 배우기보다는, 핵가족화 된 가정에서 각종 전자매체를 통해 삭막한 물질성이나 상품성이나 그 메커니즘을 더 먼저 더 많이 배워야 하는 오늘의 아이들은 그래서 되레 자극적인 “욕이 들어가지 않으면 싱겁고, 말발이 서지 않는다”는 병적 정서의 결핍을 앓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 오늘의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그런 청소년들이 힘써 배워야만 하는,
진정한 인성 교육은 무엇일까요?
윤리 도덕? 문학? 철학? 그런 인문학?
다 좋습니다.
그러나 ‘배부른 시대’가 되어 갈수록
사람들이 더 이기적이고 더 핵가족화 되어가고,
피차 언어폭력이나 패륜에 시달리는 것은
그런 학문이나 지식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되레 그 반대입니다. 지금은 ‘고학력 시대’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유식한 시대’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세상의 유식한 지식을 먹고
스스로 선악이 기준이 되어,
스스로 신(神)이 되어가고 있는 ‘패역의 시대’입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그래서 ‘버려진 아이’와 같은 헬렌 켈러를
‘20세기의 기적’이자 ‘20세기의 위인’으로 만들었던,
헬렌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만큼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사랑은 시작된다.-
그렇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참된 인성(人性)도 시작됩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가장 근원적인 교육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만큼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할‘ 수 있는 교육이 무엇이냐?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유식한 학문이나 지식으로 되던가요?
물론 학문의 발전이나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도 연구도 지식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세상의 어설픈 지식은 알면 알수록 되레
자신의 존재를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교만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타락한 정체성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삼중고의 장애로 벽처럼 꽉 막혀 있는 헬렌 켈러를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없다고 사람들이 다 포기했을 때,
저 ‘기도하는 사람’ 설리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자신의 존재만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인성 교육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성(神性)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신성에 열려야만,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간 이해를 할 수 있는 인성 및 아이덴티티에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래적 정체성 자체가 또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며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명기6:3-9)
이른바 유명한 ‘쉐마 교육’입니다.
히브리어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저 말씀은 구약성경 ‘신명기’에서만 무려 다섯 차례나 언급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선지자 모세는 창조주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기에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간절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경건의 교육은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고
가정의 번영을 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네 집 문설주나 바깥문’이라는 ‘환경’도 말씀 중심으로 가꿀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이들에게 환경도 중요하다는 것은 ‘맹모삼천(孟母三遷)’ 같은 고사를 통해 우리는 익히 잘 압니다. 하긴 그래서 ‘강남학군’으로 자녀를 보내고자 ‘부정전입’까지 해서 세 번 이상의 이사도 불사하는 ‘고위층’도 많고, 외국어 등 각종 조기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님도 많던데, 그런 교육이 ‘말씀’을 중심으로 한 ‘쉐마 교육’이나 ‘경건의 교육’의 환경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강남 교육’의 과정이나 환경을 통해 배운 자녀들이 명문대학 같은 엘리트 코스와 유학 등을 거쳐 ‘성공하는 확률’이 현실적으로 매우 높다는 데이터 정도는 저도 압니다. 그러나 그런 자녀들일수록 ‘보편적으로’ 이기성이 강해서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인성(人性)과는 되레 거리가 멀더라고요. 그래서 저명한 학자이자 문인인 C. S. 루이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원리를 뺀 교육을 시키면 다만 영리한 작은 마귀들만 만들뿐이다”라고 역설했던 것이겠지요.
여하간 ‘살인’이나 ‘도적질’ 같은 행위적 범죄만이 악(惡)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양심’에 열리면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삶도 죄이자 악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녀들은 물론이고 ‘이웃’을 위해 이타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부모님을 모신 자녀들은,
진실로 복이 있는 산 교육의 스승을 모신 자녀들입니다.
상대적으로 못나고 무식하다 쳐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눈물의 기도’를 드릴 줄 아는
부모님을 모신 자녀들이 더 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기도나 말씀의 환경 자체에 축복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섭리의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녀들은 설령 청소년기에 타락해서 방탕의 길로 갔다 쳐도,
그 어머니 모니카의 오래 참는 ‘눈물의 기도‘를 통해 회개한 이후
시대를 뛰어넘어 되레 수많은 인생을 구원으로 인도했던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의 경우처럼,
미래에 ‘하늘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예레미야 애가2:18-19)
사도 바울도 신앙 후배이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듣는 이들에게 복이 있는 말씀 곧 성경 교육의 비밀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함이라.-
(디모데후서4:14-17)
한편, 구약성경에는 무례한 말이나 불경한 말 같은
언어폭력 그 자체만으로 인해 죽음(死刑)을 당하는
죄가 딱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위기24:15-16)
다른 하나는 이것입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애굽기21:17)
그러니까 하나님 내지 '성령(聖靈-누가복음12:10)'을 ‘저주하면’ 자기가 죽고,
또한 부모님을 ‘저주하면’ 자기가 죽습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는 부모님의 위치나 권위는 그렇게 엄중한 것입니다.
저 하나님을 ‘저주하다’와 아비와 어미를 ‘저주하다(curse)’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카랄’인데, 그 의미를 풀어보자면 딱히 ‘재앙이나 불행이 닥치기를 빌고 바라는’ 그런 ‘저주(詛呪)’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멸시하다, 가볍게 여기다, 업신여기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부모님 연배이신 어른들에게 말조심 곧 언어폭력이나 패륜을 조심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막말로, 부모님이나 상대방인 어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입술로 자기가 죽을죄를 짓는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앙천이타(仰天而唾)’ 곧 ‘하늘에 침뱉기’라는 동양의 성어도 같은 맥락의 의미가 되겠지요. ‘하늘’을 향해 거칠게 침을 뱉을수록 그 침이 결국 자기 얼굴에 떨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성경의 ‘말씀’이 말씀으로 끝나버리면 구원도 생명도 되지 못합니다.
여느 윤리도덕서적에 나오는 말씀과 다를 바 없지요.
‘하나님의 영(聖靈)’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한복음1:14)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성령을 통해 ‘말씀이 삶이 되어’ 살아서 세상을 사는 우리의 삶으로 체현 및 구현될 때 비로소 산 교육이 되고, 우리의 구원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그럴 것이 말씀 자체가 저 사도 바울의 증언처럼 '하나님의 감동' 곧 성령을 통해 선지자들에게 계시되어 오늘의 성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靈)의 비밀’에 열려져서,
겸손하게 기도하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오늘도 임하는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를 통해,
'말씀'이 '우리의 죄'를 치유하고
복된 '우리의 삶'으로 체현될 수 있어지기를!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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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살 된 자식은 당신의 주인이고,
열 살 된 자식은 당신의 노예이고,
열다섯 살 된 자식은 당신과 동등이다.
그 후부터는 교육시킨 방법 여하에 따라
당신의 벗이 될 수도 있고,
당신의 적이 될 수도 있다.-
*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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