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도 한 자락 바람은 불어왔습니다.
일전에 운동 삼아 동네 주변을 걷고 있는데,
옷자락을 날리는 마파람이 휘익 불어왔습니다.
그냥 바람만이 아닙니다.
진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바람이었습니다.
은은하고 품위 있는 라일락 향기가 밴 바람.
그것은 저로선 근래에 맡을 수 없었던,
마음까지 휘익 울리는 참으로 진한 향기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과연 저쯤의 담장 너머, 누군가의 집 정원에
만개한 라일락(紫丁香)이 숨어있는 듯 서있었습니다.
말이 정원이지 그냥 옹색한 마당 한쪽에
단 한 그루로 서있는 라일락이었습니다.
그래도 향기는 충만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간 저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라일락에게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너는 세상의 향기로구나. 고맙다.
낯선 사람인 나에게도 네 향기를 나눠줘서.”
물론 응답은 없었지만 저 ‘라일락’은 그렇게
내 앞에서 부러운 신앙 인격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럴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향기’의
의미를 라일락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린도후서2:14-16)
‘그리스도의 향기’는 오늘도 여전하게 세상에 퍼지고 있습니다.
‘바람’ 곧 ‘퓌뉘마’라는 ‘성령’의 바람을 타고 퍼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저 ‘그리스도의 향기’가 모두에게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되레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는 것. 그럴 것이 노아의 홍수 심판이 있을 때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구원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홍수’ 자체가 사망에 이르는 심판이 된 것처럼 ‘생명’이라는 구원과 ‘사망’이라는 심판은 동시적으로 성취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세상의 모든 심판적인 ‘홍수’나 ‘풍파’를 능히 이기며 살 수 있는 구원의 비밀이자 삶의 비밀은, 오늘도 오직 ‘방주 안에서’ 사는 삶 그것입니다. 환언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 그것이라는 것. 그것이 오직 복음을 위하여 치열하게 살았던, 저 ‘위대한 종’ 사도 바울의 신앙 및 신학의 절대 명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서 풍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마티스, 피카소 등과 함께 20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화가이자
뛰어난 성화(聖畵)작가였던 프랑스의 조르즈 루오.
그의 대표 작품으로 평가받는 ‘미세레네(Miserere)’ 곧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제하의 연작(連作)에 속하는 한 작품 아래에는,
화가의 친필로 이런 메시지가 ‘화작(畵作) 노트’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향나무처럼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도 향을 묻혀준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23:34)
그렇게 자신을 저주의 십자가에 처형하는 무리들에게 ‘향을 묻혀주신’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그랬고,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본받으며 살았던 사도 바울이나
순교자 스데반의 삶이 그랬고, 모든 성자 성녀 등 신앙위인들의 삶이 또한 그랬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찍는 도끼‘에게조차도
향을 묻혀 줄 수 있는 ‘향나무’가 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억지로 되는 것도, 위선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자체가 ‘향나무’ 같은 온전한 신앙인격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선(善)이자 사랑이자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긴 저 자신부터 ‘향나무’ 같은 성자 성녀의 분수는 못된다 쳐도, ‘라일락’ 같은 향기라도 되어야할 텐데 싶어 걱정이 됩니다. 그럴 것이 입으로만 ‘주여, 주여’ 읊어대는 ‘가시나무’나 ‘엉겅퀴’는 환갑 진갑의 세월이 지나도 향기와는 영 거리가 멀더라고요. 나잇살 들어갈수록 되레 ‘가시’만 거세지는 사람들도 있다 싶어 그래서 제 정체성 역시 걱정이 된다는 거지요.
한편, 은행나무는 철따라 녹음 및 단풍으로 미관을 아름답게 가꾸고 또한 병충해와 공해에도 강해서 가로수로 즐겨 식재되던 나무입니다. 나름대로 좋은 열매도 맺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에서 나는 특유의 ‘악취’로 인해 지금은 사람들에게 기피 내지 비판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은행나무 중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암컷은 점차 퇴출시키고, 수컷만 가로수로 살려나갈 방침이라는 기사를 언젠가 읽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 ‘은행나무’의 입신이 왠지 오늘 우리 사회에 가로수처럼 서있는 ‘기독교’의 모습과 같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저만의 기우일까요?
각설하고,
이웃을 살리려면 그래서 향기도 좋고 그 열매도 좋아야 합니다. 열매도 좋고 그 향기도 좋아야 합니다. 물론 라일락이나 향나무는 유실수(有實樹)가 아니지만,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 등의 잘 익은 과일치고 악취가 나는 과일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에게서 악취가 나면 자기가 썩어가고 있다는 증좌이겠지요.
더 큰 문제는, 악취에는 마비성이 있어서 자기의 악취를 자기는 맡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눈’도, ‘듣는 귀’도, ‘깨닫는 마음’도 다 마비되어버린 사람들은 결국 그들 스스로의 내일 및 내세가 불행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나는 냄새는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해봅시다.
겸손하고 선한 ‘그리스도의 향기’일까요?
여전히 이기적인 인간인 ‘나의 악취’일까요?
악취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악취는
교만이나 독선 같은 영적 악취입니다.
아울러 각종 탐욕인 육적 악취입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향기로 그들을 알리라.’
지금 우리가 맺은 열매는 또한 어떤 것일까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5:22)’일까요?
화려한 그러나 썩어질
그래서 세월과 함께 사라질
재물이나 부귀영화 같은 ‘성공’ 일색인
‘세상의 열매’ 내지 ‘육신의 열매’일까요?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지요.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라.-
그렇습니다. ‘성공’의 생명은 한 때, 한 시대입니다.
대통령의 성공의 생명도 단 ‘5년’입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영원한 승자(勝者)는 없습니다.
‘성공’보다 생명이 더 긴 것은 ‘가치’입니다.
그래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고요?
‘세상’이나 심지어 ‘하늘’이라는 가치보다 더 소중하고
영원한 가치 자체는 ‘말씀’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24:35)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렇듯
긴 안목에 열려져서 아니 영원한 안목에 열려져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선지자들처럼 심령의 눈으로,
속사람의 눈으로 내일 및 내세(來世)까지를
미리 보며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사흘 후의 부활과 하나님의 우편을
미리 보며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선지자 모세처럼 내일의 구원과 ‘가나안 땅’의 축복을
미리 ‘보는 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늘’ 이상의 세계인
내세 곧 ‘하나님의 나라’까지를 미리 ‘보는 눈’의 안목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안목으로 보면 ‘천 년이 하루’일 수도 있고,
‘하루가 천 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안목이 백년의 세계에만 열려져도,
지금 생존한 우리의 모습은 다 죽고 다 썩어 흙으로 돌아가 있는
허무한 ‘세상’이자 그 모든 ‘성공’의 열매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래서 결국에는 낡고 썩어질
겉사람이나 세상의 열매들에게 너무 속지 맙시다.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가치 자체는 오직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이자 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7:20)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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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자신이 더 약하게 느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더 힘껏 기댄다.
그리고 더 힘껏 기댈수록
우리는 더 강해진다.-
*조니 에릭슨 타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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