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로 점철된 전후(戰後)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인생 선배들이 겪어야만 했던 민족의 가난이자,
서민인 저나 우리 모두가 겪어온 지난날의 삶의 가난이
작고한 시인 박재삼의 시에 이렇게 그려져 있습니다.
-국민학교를 나온 형이
화월여관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그 층층대 밑에
옹송그리고 얼마를 떨고 있으면
손님들이 먹다가 남은 음식을 싸서
나를 향해 남몰래 던져 주었다.
집에 가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누이동생이
부황에 떠서 그래도 웃으면서
반가이 맞이했다.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 많이 먹었다며
빤한 거짓말을 꾸미고
문득 뒷간에라도 가는 척
뜰에 나서면
바다 위에는 달이 떴는데
내 눈물과 함께
안개가 어려 있었다.-
「추억에서 30」
형이 ‘남몰래 던져준’ 여관의 남은 음식으로 연명하는
가족의 처참한 가난이 ‘시인의 마음’을 통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가난’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가 될 수 있는 것은
거기 ‘가족’ 혹은 ‘우리’라는 사랑이 ‘눈물과 함께’ 담겨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의 가난’의 함께 보듬고, ‘우리의 눈물’을 함께 나누며 살아온
저런 형제나 가족들이 훗날 재산 문제 때문에 법적 투쟁까지 벌리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지금도 재산 문제로 서로 앙숙이 되어 친형제 간에 법적 소송을 벌이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인 삼성가(家)의 형이나 동생의 삶과,
가난한 저 시인의 형제의 삶 중 어느 형제의 삶이
그들의 부모님이 정녕 기뻐하시는 ‘행복한 삶’일까요?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하나님이 정녕 기뻐하시는 ‘행복한 삶’일까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태복음19: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자(the poor)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누가복음6:20-21)
저 ‘가난한’ 곧 헬라어 ‘프토코스’는 ‘거지 같은, 비천한(beggarly)’ 의미도 함께 가지는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명사로 사용되어, 병든 몸으로 부잣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얻어먹고 살던 나사로 그 ‘거지’(누가복음16:20)가 또한 ‘프토코스’입니다. 그 정도로 비참한 가난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자에 대한 인간 이해를 공자처럼 “네가 길을 잘못 들었다”거나, 석가처럼 “전생의 죄악 때문인 네 업보(業報)다”라는 식의, 과거적 내지 인과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소망과 비전으로 인도하는, 미래적인 인간 이해를 선포하십니다. 되레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물질적 가난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역설적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실이나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신 때문인가?
저는 여기서 가난을 미화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를 시기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나 재물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니까요.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나 인격 자체가 늘 문제이니까요.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그 이유를 진솔하게 묵상 내지 상고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은 ‘가난’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가난 자체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격 차원입니다. 가난해서 의지할 재물도 없고, 내로라 내세울 것도 없는 그래서 ‘겸손한 자’가 된 그 신앙 인격(人格)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 5:3)’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한 마디로 ‘겸손한 자’이니까요. 그래서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인격적으로 ‘나의 것’으로 될 때 비로소 복이 있다는 것. 진정으로 ‘천국’을 소유할 때 비로소 복이 있다는 것.
말을 바꾸자면, 성숙한 그리스도 신앙 인격이 ‘나의 것’이 될 때 비로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심령에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가난’은 다만 부끄러운 가난이자 불편한 가난으로 끝나고 말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5:8)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가난’ 그 자체가 아니고, 겸손한 마음이자 ‘청결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은 그런 마음 내지 심령을 가질 수 있는 지름길 내지 좁은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본받아 청빈의 삶 아니 숫제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런 것처럼, 그 마음에 ‘자족(自足)할 줄 아는’ 천국을 소유하면 ‘가난’은 되레 짐이 가벼운 그래서 복이 있는 ‘자유’가 됩니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인생사는 스스로 어른이 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가면서, 재물이나 지배적인 행세나 정욕 등 각종 ‘탐욕의 밧줄’로 스스로 무겁고 복잡하게 묶어서 스스로 무겁고 복잡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분명히 해둡시다. 재벌도 하루 세 끼 이상은 먹지 못합니다. 스스로 불로초를 구하던 진시황도 빈손으로 죽었습니다. 일류 호텔에 묵는다고 단잠이 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른바 '잘 먹고 잘 사는' 영양 과잉이 되레 각종 성인병의 요인이 된다더군요. 그런 것이 진정으로 부러워할 가치는 아니라는 것.
실로 참된 인생의 길은 단순한 것입니다. 복잡한 길은 미로이자 미혹입니다. 참된 진리도 단순한 것입니다. 복잡한 것은 학문이나 철학이지 진리는 되레 단순합니다.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삶 역시 복잡한 것이 아니고 단순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삶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의 소원'은 ‘부자 되기’ 일색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의 재물을 믿고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렵다’는 것은 아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친히 강조하신,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한계에 관한 말씀이 사(四)복음서 전체를 통해 딱 두 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다시 묵상하며, 우리 함께 유념해둡시다.
그 하나는 이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한복음3:5-7)
다른 하나는 이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18:2-4)
우리는 지금 진실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일까요?
말을 바꾸자면, 타고난 정체성 자체부터가 타락한 죄인이자 이기적인 우리는
회개하고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일까요?
또한 우리는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 진실로 ‘자기를 낮추는’,
그런 겸손한 신앙 인격이 되어 있는 사람들일까요?
‘어린 아이’는 물질적으로도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래도 내일 일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잘해주든 못해주든, 자기 부모님을 오직 믿고 의지하며 단순하게 삽니다.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 부모님의 손에 맡기고 평안 내지 태평 일색으로 삽니다.
그런 ‘어린 아이’의 마음을 두 가지로 집약시켜보자면
그것이 바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고,
우리가 욕심이 없어 천진(天眞)하다고 표현하는 ‘청결한(순결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 나라를 ‘너희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복이 있는 마음이자 삶이라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나라와 그 의를 중심으로 산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곧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고 신앙고백은 하면서도 실상은 세상이나 재물 중심으로 사는, 자기가 주인 내지 어른이 되어 사는 그런 모순적인 신앙인의 모습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본받으며 산다고 입으로 고백은 하면서도, 실상은 그리스도의 크고 넓고 깊고 높은 그 온전한 마음과 헌신의 삶은 전혀 닮지 못하고 여전히 이기적인 속물 내지 소인배로 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연조가 오래면 오래일수록 되레 더 큰 부끄러움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무례하고 ‘뻔뻔한 얼굴’의 모범을 보이는 ‘영적 지도자들’(?)도 많은 오늘의 신앙풍토이고 보면, 그나마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그래도 양심이 ‘청결한’ 사람 쪽에 가까운 경우가 될 수 있겠지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더욱 ‘자기를 부인하며’ 더욱 비워야 하고 더욱 겸손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그럴 것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베드로전서5:5)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나 순례자는 짐이 가벼울수록 더 좋다고 했습니다.
개가 내로라 짖어도 목적지가 있는 순례자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제 길을 갑니다.
배부른 돼지가 우리에서 하여가(何如歌) 타령을 해도
목적지가 있는 순례자는 거기 머무르거나 안주하지 않고
오늘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제 길을 갑니다.
실인즉 자본이나 물질이나 황금만능 같은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개’나 ‘돼지’에게는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나라도 필요 없습니다. 참 마음이니 참 행복이니 하는 ‘추상적인’ 수식어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개나 돼지일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되지 않아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7:6)
지금 시장하십니까?
우리의 속담에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 ‘시장’이 복이 있나니 이후에 ‘반찬’이라는 소유가 될 것입니다.
지금 저 시인의 소년시절처럼 가난하십니까?
우리 속담에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고생, 그런 가난은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이후에 그것이 ‘시인의 마음’ 아니
자기를 낮추는 ‘어린 아이의 마음’을 이루고,
그 마음에 복된 ‘하나님의 나라’ 곧 ‘사랑과 정의의 나라’가 채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천국 사람’이 되면,
우리는 세상의 각종 가난으로부터 또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살아계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의 섭리를 증언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도 그것을 우리에게 이렇게 보증해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1-33)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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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도시의 아주 가난한 사람들,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가장 먼저 청하는 것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그들이 헐벗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면서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굶주려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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