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이형선 2013. 5. 20. 10:41

 

‘하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이제는 하늘로 돌아간 ‘바보 시인’ 천상병.

그의 시「귀천(歸天)」은 언제 읽어도

동심(童心)으로 와 닿는

순수한 울림이 있어 좋습니다.

마음과 삶을 맑게 해주어서 좋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세상의 상식적인 기준으로 볼 때,

수재였던 시인 천상병은 결코

‘아름다운 이 세상’을 살았던 분이 아닙니다.

37세 때,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가혹한 물고문 및 전기고문을 받은 그는 육 개월 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마침내 석방되지만, 그러나 그는 그 후 몸에도 정신에도 고문의 심한 후유증과 가난을 앓으며 마치 ‘폐인’처럼 혹은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살아야했던 분입니다. 연고자를 알 수 없는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수용시설이나 정신병원에 버려진 적도 있었을 만큼 ‘불운했던’ 그의 생애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한 많은 이 세상’이라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이 세상’이라고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복수하고 싶은 원수도 많은 이 세상’이라고 이를 갈지도 않습니다. 그는 여일하게 ‘아름다운 이 세상’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있는 가식일까요? 위선일까요? 그냥 글 장난일까요? 물론 전혀 아닙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혹은 ‘바보’처럼 된 그는 그래서 되레 시대의 구조악이나 악연의 인간들조차 용서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새벽빛’이나 ‘이슬’, ‘노을빛’이나 ‘구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래서 되레 ‘아름다운 이 세상’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 천상병 시인의 신앙의 신실함 여부를 저는 전혀 모르지만 제 나름대로의 ‘성경적 비약’이 허락된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늘(heaven)’ 곧 ‘하늘나라’를 살았던 분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럴 것이 그분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고 있었다 싶으니까요. 따라서 중심이 ‘새벽빛’으로 시작해서 ‘노을빛’으로 끝나는 매일 매일의 삶이 ‘나 하늘로 돌아’간 삶일 수도 있고, 또한 청춘의 때는 ‘새벽빛’과 ‘이슬’과 더불어 동행했기에 ‘나 하늘로 돌아간’ 삶이자, 노년의 때는 ‘노을빛’과 ‘구름’과 함께 동행했기에 ‘나 하늘로 돌아’간 삶일 수도 있다 싶기 때문입니다. 꿈보다 해몽일까요?

여하간 그렇다면 그것은 성경적 내지 신학적 표현으로 ‘현재적 하늘나라’를 살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것은 물론 부분적인 하늘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작 돌아갈 미래적인 온전한 ‘하늘’이 또 있습니다. 진정한 ‘종말적 하늘나라’가 또 있다는 것. 그래서 시인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풍’이라는 ‘나그네 길’의 여정을 마친 후에 돌아갈 ‘하늘’을 분명하게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여기서 어떤 ‘문학 리뷰(review)’를 전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 한 편의 시에서도 명징하게 증언되어 있는 바처럼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누구 내지 무엇과 ‘더불어’, ‘함께’ 사느냐에 따라서 곧 동행하느냐에 따라서 현재적으로 ‘하늘’을 볼 수도 있고 미래적으로 ‘하늘’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저 시인처럼 ‘새벽빛’이나 ‘이슬’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일까요? ‘노을빛’이나 ‘구름’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일까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정욕 같은 세상의 각종 욕심과 함께, 각종 탐욕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찌든 ‘어른의 눈’이라면, 그런 눈에는 진정한 ‘하늘’이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작가 쌩 떽쥐뻬리는 그의 명작이자 걸작인「어린왕자」에서

그런 어른들을 이렇게 우회적으로 꾸짖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가장 긴요한 것을 물어보는 적이 없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지? 나비를 채집하지 않니?”

 이런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이가 몇 살이지? 형제는 몇이고?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 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림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턱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거 정말 좋은 집이구나!”하고 소리 지르는 것이다.-

 

 

각설하고,

그럼 우리가 진실한 ‘하늘’ 곧 ‘하늘나라’를 보기 위해서

‘더불어’, ‘함께’ 동행해야 할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진정한 대상은 누구일까요?

선지자 미가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to act justly),

 인자를 사랑하며(to love mercy),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먼저, ‘정의(正義)’의 실현입니다.

저 ‘정의, 공의(公義), 공평’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하다(*솨파트)’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경제적 거래나 재판 등 크고 작은 모든 인간 및 사회적 관계에서 올바르고 정직하게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정의’의 반대어가 무엇입니까. ‘불의’ 아닙니까. 따라서 거짓이나 부정, 부패. 비리, 불평등 등을 자행하고 그런 세력이 위세를 부리는 사회가 되어서도, ‘무전유죄(無錢有罪)’나 '유전무죄'나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사회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불의나 불평등이 득세하는 사회에서 직간접으로 가장 피해를 보는 부류는 늘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성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로새서4:1)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祭祀)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언 21:3)

 

 

다음으로, ‘인자(仁慈)’의 실현입니다.

저 ‘인자’ 곧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그런 ‘은혜, 자비, 사랑, 긍휼’을 포괄적으로 의미합니다. 이기적이거나 이해 타산에 의한 ‘사랑’이 아닙니다. 가족 간의 사랑도, 남녀 간의 사랑도 아닌, 희생적이고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중심으로 한 가치이자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부부, 이웃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의 말씀으로 대입시키자면 “주 안에서 사랑하며”, 그렇게 되겠지요. 그럴 것이 ‘인간 안에서’의 모든 사랑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변덕과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상의 ‘정의’와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친히 요약하신 ‘둘째 계명’인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의 절대 가치입니다. 아울러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먼저 구해야 할 ‘첫째 계명’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역시 ‘겸손하게’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교만하면, 첫 단추부터가 비틀어진 삶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내가 동행 내지 공존하는 복된 삶의 비결, 신앙의 비결에는 과연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습니다. 한 마디로 먼저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삶, 그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공평한 정의’도 나오고, 하나님의 ‘인자한 사랑’도 나옵니다.

 

 

선지자 모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한’ 삶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명기10:12-13)

 

 

그렇습니다.

그것이 진실로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중심이자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행복을 위해서도, 모세의 행복을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을 위해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왠지 자기가 손해를 볼 것 같고, 자기의 재미나 자유가 구속당할 것 같은 타산적 시험에 빠지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되레 ‘네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자녀인 너희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바로 참 ‘내 행복’,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 보다 긴 안목에 열려지면 그것이 밝히 보입니다.

 

 

물론 ‘사랑’처럼 헤픈 세상의 타령이나

용어가 또한 ‘행복’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풍파나 숫자나 감정에 따라

조석으로 변하는 그런 ‘행복’이 참 행복이던가요?

그럼 왜 다음날은 불안합니까?

그럼 왜 다음날은 이혼을 합니까?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차별도 없이 변함도 없이

누구나 서로 섬기며 누릴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의 참 행복의 비밀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기를!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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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의 어떤 삶도 하나님과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는 삶보다

 더 달콤하거나 즐겁지 않습니다.

 이것을 힘쓰고 체험한 사람들만이

 이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동기로

 하나님과의 대화를

 힘쓰라고 충고하지 않겠습니다.

 단순히 이러한 체험이 가져다주는

 기쁨만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사랑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과 이렇게

 사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비워진 마음속에 비로소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십시오.

 

 

 

 

                               *앤드류 머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