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삼각산(三角山)

이형선 2013. 4. 29. 09:30

 

세속

한가운데 살지만

물들지 않는다.

 

 

세상

한가운데 살지만

세상을 늘

내려다보고 산다.

 

 

잡초도

가시나무도

뱀조차도

품에 안고

살리면서.

 

 

사람은

울고 불며

오고 가지만

세월은

먹고 마시며

오고 가지만

제자리 지키며 늘

남은 자로 산다.

 

 

불법이 무성한

어두움

한가운데 살지만

늘 깨어 있는

파수꾼으로 산다.

 

 

새벽은 오는가?

지금은 몇 시인가?

 

                       (Ω)

 

 

  

       *

 



예나 지금이나 세월도 왔다가 가고,

사람도 왔다가 갑니다.

나그네처럼 왔다가 덧없이 갑니다.

저나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가겠지요.

그러나 저 ‘삼각산’은 의구한 모습으로 여전히 저기 남아 있습니다.

삼각산의 모습에서 ‘남은 자’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구속사(救贖史)의 중심을 이루는

‘남은 자(Remnant)’ 사상이 동맥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진실로 인간 및 세상을 살리는 최고 지혜이자 지식이자 진리이자 사상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등을 위시한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그것을 직접 내지 간접화법으로 예언 및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이사야10:20-23)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생활 전후의 사건을 통해

저 예언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미래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이라는 공동체의 역사는 끝났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나라의 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각 시대의 ‘남은 자’를 통해

깊은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서 ‘바다’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를 살았던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셨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로마서11:2-5)

 

 

그렇습니다.

참된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배가 고프더라도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칠천 명’이라는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만 남았다’는 신앙적 고독이나 좌절이나 오해나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만 잘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신앙적 독선이나 교만에 빠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은 ‘칠천 명’이라는 나보다 더 경건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겸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선지자 엘리야'를 포함한 '칠천 명'이라는 '남은 자'들조차도

그들 스스로가 잘 나고 잘 믿는, 온전한 의인이어서 남겨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사도 바울의 갈파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겨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멸하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그래도 '롯'이라는 인간은

은혜와 긍휼을 입어 살아서 남겨진 것처럼 말입니다.

 

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 '하나님의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선민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바다의 모래처럼'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남은 자'들은 아닙니다. 남은 자들은 '칠천 명'입니다 

 

물론 ‘칠천’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의미하는 계시적인 '상징수'이자 '완전수'이지만,

여하간 우리는 과연 '바알' 내지 세상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이라는

'남은 자' 속에 기명되어 있는 사람들일까요?  

저 이사야 선지자의 언급처럼 세상의 재물이나 세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래서 '남은 자'들, 

그 속에 기명되어 있는 사람들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남은 자'들일까요? 

세상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되레 세상을 늘 내려다보며,

늘 남은 자로 사는 저 ‘삼각산(북한산)’의 위용이 부러운 것도 그 때문입니다.

 

 

1987년 여름.

지방에서 보행 장애인의 몸으로 낯선 서울에 올라온 저는,

당시 저를 도와 목사로 키우고자하셨던 감사한 모 어르신의 권유와 배려에 힘입어

저 삼각산에서 두어 달 가량 기도 및 요양생활을 했었습니다.

중도에 보행 장애의 몸이 된 저에게 건강을 주시면 남은 신학공부 과정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그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뛰는 종이 되겠다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었지요.

그러나 ‘내 뜻, 내 소원’이던 건강은 주시지 않더군요.

 

 

대신(?) 그때 난생 처음으로 희한하고 기이한 체험인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누가 믿거나 말거나,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신비한 ‘미스터리’ 그 자체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후 인간의 이성(理性)이나 상식 이상의 세계인, 성경에서 말씀하는

초자연적인 신비 사건이나 영적 세계가 액면 그대로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인생관 및 가치관 및 우주관이 확 뒤집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딴엔 당선 경력도 있었던 ‘글쟁이’이던 저는 목사가 되고자 하는 생각은 그만 두고,

대신 그때 주님께 받은 제 몫의 사명에 따라 그 후 병원이나 교도소 등 소외된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문필 선교 내지 문서 선교 사역에 전념해왔습니다.

잘했든지 못했든지 제가 인간에게 허락된 최고의 구원의 진리이자 지혜이자 도(道)라고 확신한,

소위 ‘불운한 삶’을 통해 오히려 낮은 곳에서 온 몸으로 확신한,

‘말씀’을 위한 사역에 일꾼으로 써주신 그 자체를 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람이 세상의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뜻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으니까.

 

 

지금은 육십 대인 저로써 허세를 부릴 나이도 이미 아니고,

사적인 어떤 계산이나 욕심도 없습니다. 다만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한 ‘말씀’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진실하게 조금이라도 더 증언하다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기쁘게 죽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싶을 뿐입니다. 제 신앙 간증이 되었군요.

 

 

각설하고,

북한산에서도 삼각(三角)으로 핵심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지칭하는 이름이 예부터 ‘신령한 산’으로 불리는 ‘삼각산’이라면,

과연 산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산은 아닙니다. 다 살아 있는 산은 아닙니다.

산맥이라는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서 다 살아 있는 산들도 아닙니다.

그럴 것이 영성(靈性) 혹은 역사성(歷史性)을 가질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후 ‘십계명’이라는 율법을 받기도 했던 ‘호렙산(시내산)’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도 하시고 쉬기도 하셨던 ‘감람산’이

‘신령한 산’이 되고,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산'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모세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 안에 들어오셔서

기도도 하시고 쉬기도 하신다면,

오늘 우리 역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산'이 될 수도 있고

아울러 ‘남은 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靈性)이니까요.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