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우울한 자와 범사에 '잔치하는 자'

이형선 2013. 11. 25. 11:24

 

잔치는 즐겁고 기쁜 일이 있을 때

치르는 특별한 날의 행사이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날마다 잔치를 할 수 있다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All the days of oppressed are wretched,)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but the cheerful heart has a continual feast.)-(잠언15:15)

 

 

이해하는 데 오해가 있을 것 같아

일부러 영문(NIV)도 병기했습니다.

마음이 즐거운 자는 실인즉 항상 마음의 잔치를 합니다.

좋은 일,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즐거워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리나 창기도 할 수 있고, 이방인이나 악인들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등으로 ‘고난 받는 자’의 마음이 결코

즐거울 수는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 그런 자의 마음은 ‘다 험악’해야 합니까?

 

저는 저 영문의 전반부를 이렇게 번역해보고 싶습니다.

‘마음이 우울한 자는 그 모든 날이 다 곤고하나’,

저로썬 이 의미가 뒷문장과 더 조화를 이룬다 싶습니다만 여하간 현재 어떤 형태로든 ‘고난 받는 자’가 그 ‘고난’ 때문에 우울증이나 불안감에 잡혀서 압박을 받으면 ‘그 날이 다 험악’해지거나 곤고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고난조차도 감사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면 우리는 초월적인 소망을 간직하고 ‘항상 잔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달리 형극의 고난을 많이 받았던 사도이자 순교자인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자 지식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그래서 사도 바울은 좋고 궂은 ‘모든 것’에 항상 감사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심령의 잔치를 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곳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 권유합니다.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면서.

 

 

지금 당신은 어떤 일로 우울증을 앓고 계십니까?

불안해서, 차라리 자살하고 싶은 생각까지 드십니까?

그러나 당신의 고난이나 고통은 사도 바울의 저 형극의 고난이나

고통에 비하면 차라리 약과일 수 있습니다.

물론 “남의 죽을 병이 내 감기만 못하다”는 속언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인내나 심령의 여유는 ‘참 신(神)이자 참 인간(人間)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나 여유와는 그 차원이 또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다만 일개 인간이었으니까요.

 

 

생후 두 살 때 앓은 열병으로 인해 이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三重苦)를 앓았던 헬렌 켈러도 주어진 고난을,

그 육체의 가시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게 받아들였고

그래서 만인이 공감하는 ‘인간 승리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후 일생을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나 빈민들을 위한 복지활동과 저술활동에 전념하며,

예수 그리스도처럼 공생애(公生涯)의 삶 내지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걸출한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렇듯 감사에는 창의적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의 능력과 감사의 능력은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솔직한 토로인즉, 삼중고 저 지경에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저 같은 사람의 분수나 역량으로는 차라리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감사한다는 게 뭡니까?

없는 것 아홉을 보지 않고, 그나마 있는 것 하나를 보는 지혜이자 통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헬렌 켈러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잃었지만,

 내 영혼을 잃지는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떡’이나 ‘육체’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또한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비관론자치고 별의 비밀을 발견하고,

 미지의 땅을 항해하고, 인간 정신의 새 지평을 연 사람은 없었다.-

 

 

당신의 고통이나 고난은 저 분들의 그것보다 더 크고 더 무겁고 더 심각한 것입니까? 저들의 고통이나 고난 앞에서 당신이나 저나 우리의 우울증이나 불안감이나 비관의식은, 자기에게 스스로 속고 있는 감정의 사치일 수 있습니다.

감정의 사치는 벗어버리면 됩니다. 그것이 또한 겸손입니다.

‘벗어버린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입니다. ‘방향을 돌린다’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회개이자 복된 구원에의 길입니다.

 

 

각설하고,

좋은 일 즐거운 일을 만나면 그래서 기쁘고 즐겁고,

나쁜 일 괴로운 일을 만나면 먼저 ‘내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회개할 일은 없는가?’를 더욱 겸손하게 살피는 심령으로 살다보면, 그 모든 범사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다 합력해서 선이 되고, 심령의 성숙이 되고, 보다 큰 소망이 되고, 영원한 구원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 및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5:18)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자는 범사에 잔치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자는,

작은 것에도 잔치합니다.

오막살이나 마굿간에서도 잔치합니다.  

빈부귀천이나 유식무식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참 복이 있는 자들의 잔치가 아니겠습니까?

 

참 잔치자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와대 영빈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신라호텔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솔로몬의 잔치보다 더 큰 참 잔치자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자 잔치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고,

우리의 심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곳보다는 저 낮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참 복도, 참 빛도, 참 소망도, 오직 거기서 나옵니다.

결코 서민의 위안도 시기도 아닙니다.

진리의 맛을 본 자는 진리의 가치를 압니다.

세상이나 자기에게 너무 속지 맙시다.

그래서 우리, 너무 우울한 자가 되지는 맙시다.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