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자기를 완전히 포기한 (신앙의) 경지'

이형선 2013. 11. 18. 12:53

 

평소에 조금씩 보며 자주 묵상하는 애독서인,

토마스 아 캠피스의 저서〈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다가 이런 글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맡겨라.

 어떤 것도 구하지 말고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라.

 순수한 마음과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를 얻게 되고, 마음의 자유를 누리게 되고,

 또한 어둠이 그대를 엄습하여 짓누르지 못하리라.

 

 자기를 포기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고 기도하며 소망하라.

 자기를 완전히 포기한 경지에 이르면 그대는 철저하게

 단순화되어 예수만을 따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느니라.

 그렇게 되면 모든 헛된 생각과 악한 마음의 동요와

 모든 걱정이 사라지리라. 그대에게서 과도한 두려움이

 물러갈 것이고, 무절제한 사랑도 사라지리라.-

 

 

‘하면 된다’는 식의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인간의 잠재 욕망과 능력을 자극하며 깨우는,

그런 성공철학 부류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말이자 모순된 말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면 된다’는 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공부든 일이든 사업이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매사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런 말씀도 하셨으니까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9:23) 

 

 

실인즉 ‘하면 된다’는 인위적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피땀을 흘려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에 성공한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은 교육수준 자체가 그러하듯이 과연 ‘우수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제법 배도 부르고 자유도 누린다고 자타가 자부하는 오늘의 우리 한국사회에, 이젠 더 이상의 불행이나 비극도 없고 탐욕이나 부정부패나 비리나 살상 같은 죄악도 없습니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며, 다 함께 공존하며 잘 삽니까? 오히려 그 반대 아닙니까?

 

 

결코 비관도 왜곡도 부정적인 시각도 아닙니다. 이웃은 차치하고, 친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가족공동체조차도 이미 해체되었고, 갈수록 자살률이나 이혼율이 높아지는 세태의 데이터가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으니까요.

인간관계와 인간의 생명이라는 존엄성의 해체, 그것보다 더 큰 비극이나 불행이 달리 또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에,

주목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4:4)

 

 

그렇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경제동물’도 아니고 ‘정치동물’도 아닙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은 그래서 되레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알고 살아야만 합니다. ‘참 행복’은 ‘이른 비 늦은 비’처럼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닐이나 과학적 시스템을 이용한 기업농(企業農)으로 성공했다고 스스로 자부해도, 큰 가뭄이나 큰 태풍 앞에서는 그것도 무력한 한계일 뿐입니다.

 

 

오늘의 필리핀이 앓고 있는 저 ‘슈퍼태풍’이라는 ‘재앙’이 어디 그 나라만의 몫이겠습니까? 내일 우리의 몫일 수도 있습니다. 이기적인 자본이나 산업이나 패권의 확대에 희생당한 환경 그 파괴에 대한 책임은 지구촌 공동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수답(天水沓)을 짓는 농부처럼 범사에 겸손해야 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천수답은 글자 그대로 저수지도 물줄기도 없어서, 오직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그런 논입니다.

 

 

상기한 토마스 아 캠피스의 저 말씀도

바로 그런 맥락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수답 짓는 농부의 심령과

같은 세계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살아계신 그리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과 자기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경지는 똑같은 비중의 의미입니다.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생으로써의 자기(自己)를 반만 포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반만 믿고, 하나님께 반만 맡긴다는 의미가 됩니다. 전적으로 타의(他意)에 의해서 태어나고,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서 빈손으로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존재의 분수이자 한계이자 정체성인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반만 고집한다고 해서 반만 지켜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16:24)

 

 

저 ‘자기를 부인하고’ 곧 헬라어 ‘아팔레사스도 헤아위톤’에서 ‘부인하다(deny)’는 동사 ‘아팔레오마이’는 ‘비난하다, 포기하다’는 의미도 함께 가집니다. 그러니까 보다 적극적인 표현을 쓰자면 이기적인 자기나 악한 자기나 내일 일을 모르는 한계를 사는 자기를 ‘비난하고, 포기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데는 늘 선수입니다. 그러나 정작 비난할 상대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재물이나 부귀영화는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결코 자기의 계산이나 야심이나 욕심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분별해 둡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적극적인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력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성령 및 그 진리를 구하는데 그렇게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는 물론이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지혜의 대명사이자 부귀영화의 대명사인 솔로몬조차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잠언2:4-5)

 

 

‘초년의 신앙’은 아주 좋았던 솔로몬 왕은 그렇게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찾았고’, 그래서 마침내 알게 되고 만나게 된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영화까지 덤으로 얻는 복을 받습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고’, 먼저 전적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결코 그런 사람을 세상의 삶에서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먼저 하나님을 구하며 산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의식주 등이 없어서 굶어죽거나 헐벗어 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황무지 같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이나 떠돌며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인 이스라엘 민족조차도 의식주의 결핍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 내지 비난 내지 포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과 탐욕을 일삼다가 그 불신앙과 그 불순종 때문에 죽었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먹을 것이 없으면 하늘에서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마실 물이 없으면 ‘반석’을 터뜨려서 거기서 물이 솟아나게 해주셨습니다. 피신한 광야에서 굶주리던 선지자 엘리야에겐 ‘까마귀’를 시켜서라도 먹을 것을 물어다주도록 섭리하셨습니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나 신분 상승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무후무한 현자(賢者)'라는 솔로몬조차도 권세와 부귀영화를 얻으니까 그 부귀영화 때문에 되레 이방여인들 및 그 여인들의 이방신들과 놀아나게 됩니다. 솔로몬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불신앙과 타락은 자기의 불행이나 허사가(虛事歌)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왕국과 민족 전체를 남북으로 분단시키는 비극과 불행의 단초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단언처럼,

예나 지금이나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정작 구할 대상도, 부러워할 대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그런 자리나 신분에 국한된 문제만도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한, 자기를 포기한 예수 그리스도는 나아가 생명 자체까지도 포기합니다. 전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죽음의)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

 

 

그렇게 자기를 전적으로 포기한,

그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한,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결국이 불행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도 그토록 완전한 믿음과 철저한 맡김에 대해선 그만큼 책임을 더 크게 느끼시겠지요.

침묵만 하실 수는 없겠지요. 희대의 기적으로 응답하십니다. ‘부활(復活)’이 그것입니다.

금세와 내세에 걸친 영원한 구원의 세계가 그렇게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완전히 포기한 경지에 이른’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1:20-21)

 

 

오늘 우리의 ‘신앙의 경지’는 어느 정도일까요?

이기적인 자기의 계산이나 야심이나 탐욕 등의 죄악성을

‘포기하는 경지’는 어느 수준일까요?

 

 

오늘도 천수답을 짓는 농부는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등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햇빛과 비를 주시고, 작물을 살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분별하는 것이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말 그대로 '한계상황'을 아는

인간의 참 지혜이고, 거기서 참 믿음도 비롯될 것입니다.    

인간 우리의 손으로 벼 한 포기의 생명조차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영의 눈이 열리면, 최선을 다 한다는 자기 몫의 노력조차도 실인즉 하나님의 전적 은혜가 됩니다.

오늘 살아서 일할 수 있는 것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은혜이니까요.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 그것이 '자기 부인'이자 '자기 포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분명한 진리는,

자기를 완전히 포기한

그래서 단순해진 ‘어린아이’는

오직 부모님만을 의지하며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그것입니다.

걱정도 근심도 불안도,

배부름도 배고픎도 ‘어린아이’의 몫이 아닙니다.

죄다 부모님의 몫입니다.

차라리 하나님 아버지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창조성의 비밀, 영성의 비밀이 거기 있습니다.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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