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복(福)은
두 세계 내지 두 차원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재적 심령의 차원인 영적인 복과
‘눈에 보이는’ 물질적 차원인 세상의 육적인 복이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영적으로 ‘초등학문’ 내지 초등학교의 시대였던
그래서 ‘율법 아래서’ 살아야 했던 구약시대나 구약성경에는 육적 세계의
복이 더 강조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복신앙의 시대였으니까요.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 때’는 실속과 실리가 있는 ‘사탕’이라는 물질적인 복이 가장 좋은 것 아닙니까. 어릴 때는 ‘사탕’도 필요하고, ‘어린이보호구역’이라는 율법의 울타리도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복신앙이나 유년기의 신앙을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비판해서도 안 됩니다. 배고픈 사람이 젖을 달라고 보채는 것이나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것은 죄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어버이나 어른들은 그런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오히려 기뻐하며, 젖도 주고 사탕을 사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키워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늘과 땅을 구별할 수 있는 성숙한 성인이 되면 그 이상의 세계를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사탕이나 떡이나 정욕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육적인 복을 중심으로 살면 결국엔 자기가 되레 허무해지고 불행해집니다. ‘뜻있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것을 구별할 줄 안다는 의미이고, 그 ‘구별’ 내지 ‘분별’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룩함’ 곧 헬라어 ‘하기아스모스’의 의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복(福)이 필요합니다. 젖과 꿀을 달라는 어린이도 복을 달라는 의미입니다. 두루 복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래서 작은 이웃들을 돕고 살리는 선한 일 많이 하시길 빕니다. 그것이 무슨 복이든지, 자기에게 있어야 남을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그러기 위해선 복에 대한 우선순위(priority)를 분명히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6:33)
먼저 현실적인 떡이나 돈을 구하라는 말씀도, 좌우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구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비현실적인 문제처럼 느껴지는 영(靈)이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인 영적인 복을 먼저 구하면, 하나님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육적인 복도 더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자 그분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成肉身)’, 곧 구약성경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때가 되면 세상에 오시리라고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인간,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자 모범이자 모델로 세상에 오신 신약시대에는 전자의 ‘신령한 복’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이 온전하게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물질적 축복이나 세상의 기복신앙에 연연해서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온전(穩全)함이 아닌 반편(半偏)의 복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지요. 신앙인이든 불신앙인이든, 유명인사든 무명인사든, 그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나 그 자녀들의 끝이나 열매를 보세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할 건더기도 없습니다. ‘반편이’인 사람이 불행한 것처럼, ‘반편의 복’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 역시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게 보이는 연예인이나 부자나 권력자가 진실로 행복한 것일까요? 홀로 조용히 거리를 산책할 수 있는 사생활조차 잃어버린 ‘스타들’의 삶이나 경호원들에 갇혀 사는 ‘거물들’의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요? 그들은 왜 허세인 체면병(體面病)이나 허무를 남들보다 더 앓으며 마약이나 술을 그토록 좋아하는 것일까요? 서울동물원에서 배부르게 사는 스타 원숭이보다, 때론 배고파도 자연의 진흙탕에서 뒹굴며 사는 원숭이가 더 ‘행복한 자’ 아닐까요?
허세이자 허무한 한계인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이기는 참 자유의 세계이자 참 복이자 영원한 복은 신령한 ‘하늘나라의 복’입니다. 그것을 증언하는 ‘새로운 언약(新約)’이 바로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의 복음이자 그 제자들의 행전입니다. 그 복, 그 구원을 위해서 되레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처형당하는 등, 고난과 형극의 길을 가다가 마침내 순교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종교적 사기꾼이나 장사꾼이라 삯꾼이나 모리배들의 위선적인 술수나 이벤트로 가능한 일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때가 되면 참 진실이나 진리 자체가 ‘그 열매’로 결국 그것을 증언 내지 증명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해도,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지요.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그렇게 분명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리스도의 신령한 말씀 자체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참 복’이자 ‘참 떡’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서, ‘하늘나라의 복’을 충만하게 받았던 ‘그리스도를 닮은 성자’ 사도 바울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를 향해 되레 세상을 이기는 참된 복의 의미와 가치를
이렇게 담대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自足)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4:11-13)
저 ‘일체의 비결’이란 게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며 배고픈 사람들은 소망으로 인도해서 말씀과 빵을 먹이며 가난한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구원하고, 배부른 ‘부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보화 그 참 소유를 위해 물질적 소유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도록 해서 공존(共存) 및 상생(相生)으로 인도하는 삶, 서로 배려하며 서로 사는 삶, 그 자체 아닙니까!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웃이라는 삼위 ‘일체의 비결’인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에만 유식하고, ‘하나님과 나와 이웃’이라는 삼위 ‘일체의 비결’을 모르는 삶은 진실한 믿음도 경건도 아닙니다.
그 ‘비결’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가난한 자리에서도, 부한 자리에서도, 유명한 자리에서도, 무명한 자리에서도, 감옥의 자리에서도, 순교의 자리에서도 거기 얽매이지 않고 진정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사심 없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아니 자기 몸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며 헌신의 삶을 살았던 신앙인격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배고픔’이나 ‘궁핍’이나 ‘비천’을 이기기는 차라리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는 물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인내하고 버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되레 이기적인 자기가 깨지면서 보다 겸손해지고, 심령의 믿음이 보다 순결해지면서 성숙 및 성화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역설적 섭리이자 영적 축복의 비밀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정작 이기기 어려울 때는 되레 자기가 ‘잘나가는’ 때입니다. ‘배부르고, 풍부’할 때입니다. 따라서 저 ‘일체의 비결’을 진정한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배부른 ‘축복’의 함정에 되레 빠져버리거나 거기 갇혀버린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것은 물질 내지 육적인 복의 노예가 됨이자 죄악과 바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잘 나간다’는 교회나 기독교 인물들이 돈이나 비리나 성적인 문제 같은, 구약시대의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런 ‘떡’의 문제로 그 전철을 밟아 시궁창에 빠지는 추태와 비극을 자초하는 것도, 그래서 사회적 구설수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 및 그리스도의 이름까지 욕되게 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우리 인간의 타성 내지 속물성을 잘 알고 있었던 선지자 모세는,
유언처럼 남긴 그의 ‘모세의 노래’에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수룬(Jeshurun)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함에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신명기32:15)
저기서 ‘여수룬’이란 언어 자체는 ‘옳은 자’를 의미합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는 그래서 스스로 옳은 자인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합니다만 아울러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의미일 수 있습니다.
저 경고 및 예언의 말씀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스스로 ‘교만해진 이스라엘’ 왕국은 그래서 멸망당했습니다. 먼저 ‘배부른’ 서구(西歐)의 기독교도 그런 길을 갔고, 가고 있습니다. 다음은 우리 한국 차례일까요?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구속사가 멸망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전쟁의 비극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프랑스 혁명사〉를 저술했다던,
저명한 영국 사상가이자 사학자였던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이 이런 말을 했지요.
-고난을 이긴 자는 많다. 그러나 성공을 이긴 자는 드물다.-
실로 그렇습니다.
오늘도 신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관을 신앙처럼 추종하며 돈을 잘 버는 데 성공한 자는 많지만, 그 돈을 잘 쓰는 자는 드뭅니다. 세계 10%의 ‘부자’가 여전히 세계 부의 70-80%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억의 가난한 지구촌 인생들이 오늘도 ‘굶주림’이라는 절대빈곤의 고통을 앓으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아버지 하나님이 보시면, 과연 그런 소유가 ‘축복’일까요? 차라리 저주이자 재앙 아닙니까?
실인즉 하나님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우리의 죄악이나 탐욕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이웃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스스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마음을 잃은 인간들 그래서 이기적인 죄악과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들 그래서 서로 시기하며 증오하며 살상하며 외면하며 살아가는 ‘실락원(失樂園)’의 지구촌, 이 실상이 바로 그런 불행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필연적으로 ‘거듭나야만(重生)’ 살 수 있는 비극이자 불행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지상명령을 주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또한 권력 역시 그것을 잡는데 성공한 자는 많지만 그 권력을 잘 쓰는 자는 드뭅니다. 권력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정적(政敵)을 숙청하고, 금력(金力)과 야합하기 마련입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던가요?
여하간 그렇듯 ‘눈에 보이는’ 육적인 복을 갈망하고 선망하는 자는 많고 그것을 받은 자도 많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영적인 참 복을 받은 자는 드뭅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세상의 복으로 되레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세상에서 ‘잠깐’ 살다가 다 빈손으로 죽어서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처럼,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필연 앞에서, 자기의 내세도 살리고 자기 자녀들이나 후생들의 미래도 살릴 수 있는 신령한 복이자 영원한 복에 주목하지 못하고, 다만 세상 육적인 복에 주목하며 그것의 노예로 사는 사람은 그래서 그 결국이 더욱 허무하고 불행할 것입니다.
구약학박사이자 율법학박사였던 처음의 삶보다
나중과 끝의 삶이 더 훌륭한 신앙인이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도 바울이 주목하는 복이자
신앙 중심이자 삶의 가치관을 다시 들어봅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4:18)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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