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어떤 '명품'과 '신(神)의 성품'

이형선 2013. 10. 28. 09:41

 

삼백여 년 전에,

안토니우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한 이른바 ‘명품’ 바이올린들.

그 악기의 한 대 가격이 수십 억 원을

호가한다는 말은 이미 새로운 말도 아닙니다만,

얼마 전에 그에 관한 지상파 방송뉴스를 다시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1745년도에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명품’ 바이올린과

현대에 제작된 바이올린과의 소리분석 비교에 관한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 배명진 교수의 발표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론은 한 마디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한 바이올린이 현대에 제작된 바이올린에 비해 배음구조가 두 배 이상 더 넓게 나타나는 등 음폭이나 음정 등의 음질이 훨씬 탁월한 것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인가 봅니다.

전 음악이나 악기에 문외한입니다만,

바이올린은 밑판의 나무 재질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소리의 크기와 음폭, 선명성이나 안정성이 거기서 결정되기 때문이랍니다. 따라서 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그 뛰어난 음질과 함께 오늘까지 명품으로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17-18세기 북유럽 지역의 나무를 밑판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백 수십 년 간 매우 추웠던 그때 그 추위 속에서 자란 목재의 나이테가 균일하고, 나무의 밀도 또한 가장 높았기 때문입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그의 뛰어난 장인정신으로 그 비밀을 일찍이 꿰뚫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거기서 북유럽의 자연 그 위에 있는 어떤 심오한 영감(inspiration) 내지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문득 조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것이 저 북유럽의 나무를 의인화시켜보자면, ‘강한 추위’ 곧 ‘큰 고난’을 잘 견디고 잘 이겨낸 사람이 안으로 그만큼 고르고 선명한 나이테를 남기고, 또한 밀도 높은 좋은 재질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속사람’의 영역이자 영성(靈性)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강한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고 잘 이겨낸 나무일수록 안으로 그만큼 선명한 나이테를 남깁니다. 그것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허무한 세상 혹은 헛된 세월만을 살아온 것은 결코 아니라는 나무의 의표이자 ‘신앙고백’일 수도 있겠지요.

그럼 인생인 우리는 ‘안으로’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요? 재물? 부동산? 신분? 족보? 그 세습?

사도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도 다 ‘잠깐 보이는’, ‘겉사람’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겉사람(outwardly)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inwardly)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4:16-18)

 

 

세상을 사는 우리가 늘 아우성을 치는 떡이나 재물이나 권력이나 육체의 문제가 아니고,

‘속사람’인 심령의 문제이자 말씀의 문제라는 것.

그런 사도 바울은 ‘속사람’의 푯대를 이렇게 정의 및 집약시키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2:5-8)

 

 

저 ‘하나님의 본체’에서 ‘본체’ 곧 헬라어 ‘모르프’는 ‘형상, 모양’을 또한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창세기에서 창조주 하나님께 불순종 및 타락하면서 잃어버린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우리의 본래적인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위대한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영성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세기1:27)

 

 

따라서 ‘구원’이란 우리가 회개하고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저 본래적인 성품을 회복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스스로 도를 닦는 고행이나 수행의 문제도 아니고, 스스로 교주나 산신령이 되는 문제도 아니고, 종교학박사 같은 지식인이나, 부자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 등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조상 때부터 이미 타락해서 우리 몸속에 흘러내리는 비본래적 성품 곧 악하고 이기적인 죄악의 성품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문제이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문제인 것입니다. 곧 ‘종의 형체’로 세상에 와서 ‘자기 비움과 낮춤’을 통해 시종여일하게, 끝까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다가 마침내 대속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을, 그 속사람과 삶을 본받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출세한 재벌이나 대통령 등의 성공철학이나 그런 꿈이나 야망이나 입지를 본받으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솔직히 말해서 범인인 우리에겐 현실적으로 실속 있는 ‘축복’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세상나라의 꿈에서 깨인, 보는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풀의 꽃과 같은’ 축복의 허무한 한계를 미리 알고 그런 영광들을 되레 ‘배설물’처럼 버려버렸습니다. 더 좋은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보고 듣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실인즉 그렇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나 좋은 보석을 두 손으로 꽉 붙잡게 되면 덜 좋은 것은 저절로 손에서 버려지기 마련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사람도 사람의 손도 한계를 살다가 죽는, 한계가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좋은 것만을 온전하게, 굳게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정부(情夫)나 보석이 많은 여자가 그래서 되레 불행한 것처럼 말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오늘의 신앙풍토나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운운하면서도 삶의 현장에선 온통 세상의 재물이나 자리나 그 영광을 붙잡고자 목매는 것도, 그래서 남편이나 정부가 많은 여자의 추태를 보이는 것도 실인즉 정말 좋은 나라의 진리나 그 맛이나 진면목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반증일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고 ‘온전하게’ 뒤집어지기 이전의, 입으로는 ‘주여 주여’ 했지만 여전히 ‘세상에 속한 속물’이었던 제자들의 모습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사도 베드로는 저 ‘하나님의 본체’이자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신의 성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속사람’에 선명한 나이테를 남길 수 있는 복된 인생의 비밀을

“신(神)의 성품(divine nature)에 참예하는 자”(베드로후서1:4)라고 정의 및 집약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데이아스 휘시스’ 곧 ‘신의 성품’ 내지 ‘신성한 성품’에서, 저 ‘성품’ 곧 ‘휘시스’는 ‘자연, 천성, 본래, 본질’ 등을 함께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그래서 동물처럼 이기적인 인간 자기중심의 비본래적 성품이 아닌, 타락 이전의 본래적인 성품을 회복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럼 ‘신의 성품’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이렇게 풀어줍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너희에게 넉넉히 주시리라.-(베드로후서1:5-)

 

 

그렇습니다.

재물이나 권력으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재물이나 권좌를 남겨도, ‘형제 우애’나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것은 되레 불행한 것입니다. 진정한 ‘명품’이나 진정한 행복은 겉사람의 세계가 아닌, 오직 속사람의 세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이나 후학들에게 신앙인격 곧 ‘신의 성품’을 남기는 부모나 스승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복이 있는 부모이자 스승이 될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구도자적 기질’이 좀 있었던 것 같은 저는 청년시절에, 악착같이 돈을 벌어 살 생각과는 거리가 먼, 누구 말마따나 ‘돈도 되지 않는 엉뚱한’ 불경이나 공자 맹자나 노자 장자나 성경이나 신학서 등 종교서적을 나름대로 제법 본다고 보았습니다. 그 무렵에 공자의 이 말씀을 아주 좋아했으니까요.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곧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의미가 되는데, 인생의 실존의 목적이나 절대 진리나 절대 가치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구도(求道)는 죽음 이상의 숙제라는 강조이자 설파가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그런 해묵은 숙제가 저는 마침내 성경을 통해서,

제가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자 ‘하나님의 본체’이자 ‘신의 성품’인 저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한 영안(靈眼)이 열리면서 비로소 확연하게 풀어지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는 제가 시대적인 불운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비밀’이나 그 ‘도’를 ‘아침에 못 듣고 저녁에 돌아가신’ 공자님보다 더 복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거든요.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태복음13:16-17)

 

 

그리스도를 보고 듣는  '복음’의 가치는,

참 진리의 진리 됨이나 그 생명의 가치는,

그렇게 소중하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각설하고,

그럼 이기적인 죄인인 그래서 불온전한 우리와는 달리 온전한 ‘신의 성품’이자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성품’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성품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답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5:43-48)

 

 

그렇습니다.

자기 형제나 자기 가족, 그리고 ‘입맛이 맞는’ 동족이나 집단인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세상의 윤리도덕이자 실정법입니다. 이기주의나 가족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내지 국수주의도 다 그런 범주입니다.

그러나 공자를 위시한 동서양의 성현들이나 여러 종교에도 그 정도의 윤리나 사랑이나 자비는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성에 관심이 없는 휴머니즘이나 똘레랑스에도 그 정도의 윤리의식은 다 있습니다. 세리나 이방인이나 불신자나 무신론자들조차도 그 정도는 잘 알고 잘 행합니다. 자기들의 끼리끼리의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신의 성품’ 곧 ‘그리스도의 성품’은 심지어 ‘나’를 저주하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나 악인에게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의 때 곧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둔 채 햇빛과 비를 함께 주시는”, 거룩한 사랑의 성품입니다. 바로 그런 속사람, 그런 마음, 그런 사랑을 ‘온전하게’ 닮으라는 것입니다. 실인즉 그것이 진실로 자기도 영원히 살고, 이웃도 영원히 살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기주의를 온전하게 극복한 ‘온전한’ 헌신이자 거룩한 사랑의 말씀입니다. 그런 ‘신의 성품’은 마침내 역사적 예수의 신비한 역사적 부활을 통해 그 성품과 그 삶이 영원한 ‘명품 중의 명품’이자, 반쪽이 아닌 온전한 ‘진리 중의 진리’이자, ‘왕 중의 왕’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이 친히 초월적으로 증명해주신 것입니다.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