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우화) 지리산 흑곰이 들은 하늘의 음성

이형선 2013. 10. 21. 10:17

 

지리산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예년보다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 싶었다. 그래서 흑곰은 지난겨울을

지냈던 숲 속의 멋진 동굴로 찾아갔다. 긴 겨울잠을 자기 위해서였다.

며칠 전에 와서 이미 대청소도 해두었고, 낙엽까지 푹신하게 깔아두었던

동굴로 들어간 흑곰은 돌연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누군가의 드르릉 드르릉 코고는 소리!

자기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힘도 센 불곰이었다.

흑곰은 넉살좋게 거기 누워 자고 있는 불곰을 흔들어 깨우며 항의했다.

 “불곰아, 여긴 내 집이야. 어서 나가렴!

  내가 낙엽까지 푹신하게 다 깔아둔 거야!”

 

 

불곰은 막무가내였다.

 “임마, 이 동굴 네가 지었냐?

  임자가 따로 있어? 부동산 등기권리증이라도 있냐고?

  먼저 누워 자면 임자지 뭐!”

 

 

단잠을 깬 불곰은 되레 성을 버럭 냈다. 이어 눈을 부라리며 주먹까지 휘두르자 그 기세에 눌린 흑곰은 하릴없이 쫓겨나오고 말았다. 흑곰은 너무 억울하다 싶었다. 불덩어리 같은 울화가 속에서 자꾸만 치밀었다. 힘 약한 놈 어디 살겠냐 싶었다. 이건 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정의나 숲속의 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싶었다.

 

 

그렇다고 달리 하소연할 데도 없었던 흑곰은

‘기도바위’에 올라가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간구하기로 했다.

가파른 좁은 길을 기어서 마침내 기도바위 위에 오른 흑곰은 하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저 불곰 녀석 좀 당장 심판해주세요!

  제 집 빼앗은 저 놈 진짜 나쁜 놈입니다! 제 동굴 좀 찾아주세요!

  저 놈이 지난날 제 도토리도 여러 번 빼앗아 먹었거든요. 지난겨울에 제 친구인 반달곰의 집을 빼앗아 잔 놈도 바로 저놈이고, 그 죄 없는 반달곰을 때려서 죽인 놈도 바로 저놈이라고요! 힘 좀 세다고 해서 제멋대로 주먹 휘두르며 약한 자들만 괴롭히는 정말 흉악한 놈입니다!”

 

 

하늘에서 아무런 응답도 반응도 들려오지 않았다.

찬바람소리만 쌩쌩 일고 있었다.

흑곰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부르짖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공의(公義)의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하나님! 저 나쁜 놈, 저 원수 불곰을 당장에 심판하지 않고  계속 무관심하신다면 전 정말 앞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겁니다.

  조물주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해야 합니까? 내 친구 반달곰의 애꿎은 죽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늘 기도하며 살던 착한 반달곰은 왜 그렇게 빨리 죽고, 악한 저 불곰 놈은 멀쩡하게 살아서 계속 떵떵거리며 위세를 부리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왜? 왜? 세상엔 이렇게 억울한 일들이 많아야합니까? 공의나 정의를 위해서라도 저놈을 꼭 친히 처벌해주셔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누구처럼 ‘신(神)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더 이상 이런 데 와서 기도 같은 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역시 아무런 응답이나 반응이 없었다.

찬바람소리만 더 쌩쌩 일었다.

그러자 흑곰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기도바위에서 내려왔다.

앞으로 더 이상 이런 데 와서 기도 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고 작심하며.

 

 

그 후 심란했던 흑곰은 사흘 동안이나 정처 없이 지리산 숲속을 헤매고만 다녔다.

밤중에 인가의 주막에 내려가 막걸리를 훔쳐 마시고 술에 취한 채 헤매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방황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연일 강추위가 발등에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큰 눈이 와서 쌓이기 전에 어차피 겨울잠 잘 곳은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제풀에 지친 흑곰은 그제서야 자기 마음을 바꿔먹었다.

크고 멋진 저 동굴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은 그만 버리고, 겨울잠을 잘 수 있는 다른 작은 굴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곳 저곳 살피며 돌아다니고 있는 바로 그때, 비로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흑곰아 들어라.

  야생 동물이나 곤충이나 나무의 열매들은 네가 임의로 먹되, 인가의 가축이나 농작물은 해치지 말라고 내가 친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인가에 내려가서 닭이나 오리나 농작물들을 훔쳐 먹은 적이 몇 번이더냐?”

 

 

그 횟수가 너무 많아 대답을 못한 채 머뭇거리고만 있는 흑곰에게 하늘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제 밤중에 인가의 주막에 내려가서 독에 담긴 막걸리를 두 되나 훔쳐 마시고, 취중에 힘 약한 애먼 노루나 토끼들에게 화풀이하며, ‘신은 죽었다’느니 ‘믿음도 기도도 다 헛일’이라느니 하며 횡설수설한 자가 또한 누구이더냐?”

 

 

흑곰은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내 일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방 뒷머리만 긁적거리고 있었다.

하늘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네 기도대로 나쁜 놈이나 악한 놈을 그때 그때 당장에 심판했더라면 너부터 이미 골백번은 죽었어야 했느니라. 네가 지금 이 시각까지 내 앞에서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만 해도 나 하나님의 큰 은혜이자 긍휼이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어때? 지금이라도 내가 친히 네 기도대로 너도 불곰도 당장에 심판해주랴?”

 

 

순간 흑곰은 무릎을 꿇고 땅에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아, 안 됩니다요! 그러시면 절대 안 됩니다요! 제가 드렸던 기도 다 취소하겠습니다. 제발 못 들으신 것으로 해주십시오.

  제가 마음을 크게 먹고 불곰을 깨끗이 용서할테니까, 하나님도 마음 크게 먹으시고 저의 죄를 꼭, 깨끗이, 용서해주십시오. 혹시라도 기억하시고 심판하시면 안 됩니다요. 암요, 절대 안 됩니다요.”

 

 

그렇게 엎드려 있던 흑곰에게 들려온 하늘의 마지막 음성은 이랬다.

 “흑곰아 들어라. 귀를 활짝 열고 들어라.

  스스로 있는 자인 나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공의나 섭리나 심판의 시간은, 때론 천 년이 하루 같지만 때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것도 잊지 말거라. 그 이유는 나의 이름이 또한 오래 참는 사랑이기 때문이니라. 내가 손수 지은 세상의 만물이나 생명을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못된 자식조차 사랑하는 세상 어미의 그것보다 내 사랑은 더 크고 오묘하니라.   

  네 친구인 착한 반달곰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너무 상심할 것도 없다. 그것조차도 영원한 하늘나라에 열리면 다 오묘한 사랑의 섭리가 되느니라. 세상에서 심은 억울함이나 그런 고난이나 고통은 그 선한 열매를 하늘에서 거두느니라. 결국은 자기가 심은 그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선한 열매든 악한 열매든 금세에서 거두지 못하면 내세에서라도 거두느니라.

  흑곰 너도 나그네살이인 이 세상의 삶보다 더 좋은 내세가 또 있다는 것을 믿고, 때론 양보도 하고 때론 손해도 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나 하나님 앞에서 착하게 살면, 오히려 이 세상에서부터 네가 진실로 산 자가 되고 참 복이 있는 자가 되리라.”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