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에,〈물은 답을 알고 있다〉의 저자인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江本勝) 박사가 한국에 와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물박사’로 통하는 그가 강조했던 물의 생명성은 실로 오묘한 창조의 비밀이나
인체에 미치는 물이나 언어의 힘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를 제공해줄 수 있다 싶어 사회적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요.
무엇보다도 그는 1990년대 한국에서 ‘육각수(六角水)’ 열풍을 일으켰던 한국의 ‘물박사’이자 KIST 교수였던 고 전무식 박사의 “육각수 이론과 같다”고 동의했고, 육각수의 결정 구조를 사진으로 촬영해서 과학적 내지 학문적으로 입증하는데 성공했기에 그 공감지수나 공신력이 한결 높을 수 있었습니다.
에모토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건강한 물은 그 결정 구조가 육각형을 이루고 있고, 인체를 건강하게 지켜주는 물 역시 그런 ‘육각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물은 오염이 되지 않고 순수할수록 그리고 차가울수록 육각수의 비율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물이 감정에 반응한다”는 그의 지론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있는 동물이나 식물처럼 물에도 생명력이 있어서, 물의 결정구조가 사랑, 감사, 은혜, 평화, 천사 등 건전하고 긍정적인 말이나 축복의 말에는 ‘마치 꽃이 활짝 핀 것처럼 아름다운 육각형 결정의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
반면에 미움, 원망, 불평, 근심, 전쟁, 바보, 악마 등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말이나 저주의 말에는 물의 결정구조가 거칠게 깨어진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을, 오랜 연구 끝에 마침내 현미경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이에 쓰인 글자를 보여줘도 그런 반응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이자 70% 이상이 물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저런 축복의 말(言語)의 영향력과 그 생명력 같은 반응이 더더욱 크게, 절대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힘을 내세요,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되세요’ 등 창의적이고 긍정적이고 격려적인 언어는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명으로 인도하지만, 원망 불평하고, 시기 질투하고, 교만하거나 남을 무시 내지 저주하고, 염려 근심하는 등의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어는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병들게 해서 죽음으로 인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적 언어로 줄이자면, 인간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인도하는 언어가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창조성의 비밀을 이천년 전에도 이미 아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5:22)
저기서 ‘라가’ 곧 ‘라카’는 ‘(쓸모없는) 바보, 멍청이’라는 욕설입니다. 형제나 이웃을 멸시 천대하거나 폄하하거나 조롱하거나 배척하는 말의 위험성을 무섭도록 예리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던 사람들은
12지파의 대표인 12사람이었지만, 그 중 열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합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은’ 우리는 ‘대장부들’인 저들과 싸워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부정적인 말로 일관한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출애굽 시킨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불평의 말까지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조주의 ‘반응’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수기14:28)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일세대인 저 백성들 저 어른들이 복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들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이 광야’에서 사십여 년 동안 방황 및 고난의 행군을 하다가 다 죽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렇게 원망 불평 일색이던 저 어른들이 다 죽은 후, 그 자녀들 세대에 비로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들어가서 정착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말의 영향력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만 아니라, 자기 자녀들에게까지도 그렇게 무서운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에 대한 악평이나 부정적인 말을 조심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든지 사람에게 “죽어라, 죽어라”는 악의적인 말을 해서도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 조상들의 경험담이자 지혜 그대로, “말이 씨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정신도, 인체 내의 ‘물의 생명력’도 다 병들고, 그래서 다 죽어버립니다.
물론 타락한 우리의 죄악성(罪惡性)이나 탐욕은 죽어야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는 너도 나도 모두가 다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이자 형제자매’입니다. 따라서 서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인도해서 “살아라 살아라”라고, 축복 내지 격려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에스겔16:5-6)
물론 성경에는 “하라, 하지 말라”는,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문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간섭받기 싫어하고, 자기의 야망이나 정욕이 강한 청춘의 때일수록 거부 내지 경원의 반응이 많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큰 틀과 긴 안목에 열려지면,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네 행복을 위해서”로 집약됩니다. 심지어 하나님 및 그리스도의 행복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 “네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위대한 선지자 모세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for your own good)’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명기10:12-13)
그렇습니다.
신구약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인간 ‘우리의 (참) 행복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영적 피조물인 인간에게 영(靈)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영성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이자 선지자인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도록 하라”는 말씀을 친히 주시기까지 합니다.
전통적이자 전형적인 ‘구약의 축복기도’이자 ‘제사장의 축도’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수기6:24-27)
저 말씀에서 ‘복을 주시고(bless)’의 히브리어 ‘바라크’에 주목해봅시다.
복(福)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요? 복 받는 비결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럴 것이 저 ‘바라크’ 곧 ‘복을 주다, 축복하다’는 언어가 또한 ‘무릎을 꿇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순종 및 순결 그것이 바로 복 받는 비결입니다. ‘네가 행복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지켜주시고’,
‘헤세드’ 곧 ’은혜, 은총, 자비,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샬롬’ 곧 세상의 모든 환난이나 풍파를 이기는 영육간의 ‘평강, 평화, 평안’의 복을 받는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다 ‘육각수’의 언어이자 말씀이지요?
한편,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축복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5:15-18)
다 ‘육각수’의 언어이자 말씀이지요? 과연 ‘진리’이지요?
21세기 스스로 유식하다는 인간의 첨단 이성이나 첨단 과학 이전의 세계인,
성경의 영적 통찰은 실로 그렇게 위대하고 참되고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를 살리고 아울러 이웃을 살릴 수 있는 축복의 말이나 기도를,
누구를 위해 얼마만큼이나 할 수 있을까요? 내일이면 늦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살이 아니던가요?
지극히 가난한 사람도, 지극히 작은 자도, 이웃을 위한 축복의 말이나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영성(靈性)의 비밀에 열리면, 하나님 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의
말이나 기도의 영향력과 그 생명력이 되레 더 클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물’의 영향력과 그 생명력이 되레 그런 것처럼!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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