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12월, 거리의 풍경

이형선 2013. 12. 2. 10:32

 

지금, 스스로 벌거벗은

나무들의 가난은

결코 가난이 아니다.

초라함도 아니다.

의연한 지극히 의연한

자기 비움이자 낮춤이다.

 

 

봄 여름 가을이 지난

이 겨울에도 여전히,  

이욕과 탐심으로 가득한

끝내 철이 들지 못하고

애욕과 반목으로 가득한,

인간과 패권의 시대를 향한

침묵의 시위이다.

 

 

빈 몸으로

하늘을 우러러 볼 줄 모르는

인간과 불신의 시대를 향한

침묵의 함성이다.

꾸짖음이다.

막장의 파수꾼처럼

종말적 시간을 깨우는

자연의 양심이다.

 

 

어제의 낙엽은

더 이상 뒹굴지 않는다.

더 이상 밟히지도 않는다.

그래서 빈 방도 없다.

이제 밟히는 건

영하의 현실일 뿐.

이제 우리를 위해

누가 대신 밟힐 수 있는가?

이제 우리를 위해

누가 대신 죽을 수 있는가?

 

 

구원의 답이 없다.

도시에는 메아리도 없다.

아쉬움과 공허가

교차하는

세밑의 거리는,

그냥 칼바람만 가득하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그래도 살아 있다고,

스스로 종종걸음 치는 인생들.

죄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분수보다 커진 후드만 보인다.

그래서 서로가 타인들이다.

 

 

밤은 더욱 길어졌다.

해가 떨어지면

금세 어둠이 오겠지.

가로등 빛으로도

포장마차의 빛으로도

결코 밝힐 수 없는,

어둠이 있어

스스로 종종걸음 치는 인생들.

죄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보다 커진 외투만 보인다.

그래서 서로가 타인들이다.

 

 

여전히 칼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여전히 어둠은 걷히지 않는다.

발에 밟히지도 않는다.

구원은 어디서 올 것인가?

나귀에게 꾸짖음 당한 발람은

아무리 외쳐도 선지자가 아니다.  

광야에서 외쳐야 할 선지자여.

지금은 어디 있는가?

너마저 배가 불러서 숨었는가?

물신(物神)에 먹혀서 사라졌는가?

애욕에 먹혀서 사라졌는가? 

여전히 대답은 없다.

 

 

하늘을 높일 수 있는,

저 높은 첨탑의 십자가조차

지금은 얼어 있다.

그래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가시처럼 창처럼

하늘을 되레 찌르고 있다.

사흘씩 마흔 번이 지나면

부활의 세계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무들의   

저 케노시스(비움·낮춤)처럼,

자기를 비우지도 못하고

구별되지도 못한 때문이려니.

밤엔 네온 사인도 빛을 내지만

그것이 참 별은 아니더라.

 

 

막장일수록,

사람이 대답하지 않으면

돌들이 대신 대답하는 것.

그래서일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캐럴 있어라.

희망이 오는 소식은

돌들이 소리쳐도 좋아라.

상가(商街)가 소리쳐도 좋아라.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아아, 그래서

비로소 구원 받은

우리의 겨울.

나무에게도

세상에게도

12월에게도

또 다른 시작이 된다.

낮에도 별을 볼 수 있고

밤에도 별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된다.

 

 

-노엘 노엘,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희생양이 나셨네.

 마구간 구유에서 나셨네.-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