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대과학자 아인슈타인.
그의 상대성 이론은 스승의 지도도 없이
단기간에 독창적으로 이룩한,
과학사에 전례가 없는 역사적 대업적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천재였다는 말인데,
그는 42세 때인 1921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습니다.
히틀러가 집권한 후.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유태인인 그는 하는 수 없이 54세 때 그가 태어난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그리고 76세에 미국에서 죽습니다.
여기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그의 유언입니다.
‘크게 성공한 인물’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유언은 의외로 역설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임종 무렵에 자기를 위해 '부고도 내지 말고, 장례식도 치루지 말고,
묘지나 기념비도 세우지 말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시신마저 의학용으로 기증했습니다.
장례나 의학용으로 해부된 그의 시신은 유언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만,
그는 왜 그런 유언을 남겼을까요?
그는 미국으로 이주한 6년 후, 독일 과학자들이 원자를 분리하여 핵무기 제조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과학이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하기를 바랐던 아인슈타인은 인류의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나치스의 원자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편지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냅니다.
그 편지로 인해, 미국은 되레 선수를 쳐서 ‘맨하탄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첫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원자탄은 1945년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됩니다. 인류의 행복이 아닌, 끔찍한 불행을 초래한 핵폭발의 참상을 보면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크게 고뇌하며 후회했다고 합니다. 저 유언은 그런 의미의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렇습니다.
남달리 능력이 있는 과학의 천재도 좋고, 부자도 좋고, 지식인도 좋고, 권세자도 좋습니다. 누구나 다 ‘크게 성공한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피와 땀의 노력과 의지가 또한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성공’이 이웃과 사회 내지 인류를 살리는데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아닙니다. 끔찍한 불행을 자초하는 인간 우리 스스로가 만든 ‘재앙’일 뿐입니다.
자기나 자기 가족이나 자기 집단만을 위한 ‘성공’이라면 그것 역시 결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아닙니다. 대립과 시기와 반목과 갈등을 자초하는 이기주의 내지 집단이기주의의 산물일 뿐입니다.
‘핵무기’라는 과학자의 성공도 그렇고, ‘재물’이라는 부자 내지 자본주의 성공도 그렇고, ‘유식’이라는 지식인의 성공도 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사법연수원에서 교육받고 있던 젊은 예비법조인의 아내가 자살을 해서 사회적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남편이 총각 행세를 하며 같은 연수원생인 다른 여자와 벌린 불륜의 애정 행각 때문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이룬 그 ‘성공’이 어려운 시절에 함께 했던 아내를 죽게 만든 그것이라면 자기에게도 가족에도 차라리 ‘재앙’이 아닙니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굶주림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부자의 성공은 ‘재앙 중의 재앙‘입니다. 그것 역시 간접 살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의 발언이
그래서 세계적인 뉴스로 전파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돈에 대한 숭배이자 새로운 독재”라는 내용의 비판 말입니다.
성공한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교황은 이런 말씀도 했더군요.
“‘살인하지 마라’는 십계명을 현시대에 맞게 다시 고쳐 말하면
경제는 사람들을 불평등하게 하거나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것이 곧 부자의 부는 간접 살인 행위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리고 고통 받는 자들과 낮은 곳에서 함께 하는 교회관(敎會觀)을 이렇게 설파하셨더군요.
“나는 세련되고 보안에만 치중하는 교회보다는 길에 자리 잡고 있어
더럽고, 상처입고, 부서진 그런 교회를 좋아한다.”
저 교황처럼 신분 상승을 위한 이기적인 성공이 아닌, 신학적 학문적 차원의 접근도 아닌, 목자가 양들을 초원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지극히 서민적인 공존의 삶으로 인도하는 그런 ‘복음의 기쁨’을 올바르게 전하는 기독교지도자들이 우리 한국기독교신앙풍토에서도 많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축복’이 '하나님의 나라'나 '복음'이라는 이름이나 가치로 포장되어 우리를 오도 내지 미혹하지 않는, 그런 신앙풍토가 어서 속히 이루어질 수 있게 되기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디모데후서 3:1-5)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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