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세밑인 12월은,
인생인 우리에게 주어진 한 해라는
기약의 ‘마지막 편지’일 수도 있고,
또한 그것을 스스로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마지막’은 마지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해의 끝은 또 다른 새해의 시작이 됩니다.
한 세상의 끝은 또 다른 내세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의 삶이나 가치관이 시종여일해야 할 필연이 거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맘때가 되면,
사도 바울의 생애의 마지막 편지이자 유서일 수 있는
〈디모데후서〉의 말씀에 대한 묵상이 각별해집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몸으로, 순교하기 직전에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사도 바울은 그의 죽음의 때 곧 하나님의 때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듯 태어남도 죽음도, 기도에 대한 달고 쓴 모든 응답도 오직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그 때에 의해 진행 및 역사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가장 쓰고 고통스러운 죽음조차도 기뻐하면서 의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전제(奠祭)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4:6-8)
사도 바울의 저 거룩한 자부심 내지 확신이 정말 부럽습니다.
실인즉 세상의 일도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더욱 끝이 좋아야합니다.
과정이 아무리 화려하고 대단해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가 되거나
앞장서서 열심히 달리던 자가 올바르고 선하고 진실한 ‘길’에서 벗어나 사심이나
탐심이나 미혹의 ‘길’로 빠져버리면 그 끝은 부끄러움이 되고 맙니다.
저나 우리가 ‘주여 주여’ 부르면서 살아도,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저 고백이 진실로 부럽습니다만 여하간 그는 자기의 죽음
곧 순교를 ‘전제(奠祭)’ 곧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제사’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순교의 피를, 하나님께 드려지는 희생제물 곧 희생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로서의 그의 치열한 사명의식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의
‘겸손한 종’이라는 정체성 내지 신분의식이 함축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끝까지 스스로 주인 행세도 하지 않았고,
분수에 넘는 교만이나 위세를 부리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각 창조주 하나님께 받은 믿음이나 은사의 분량이 다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그릇’의 크기나 용도가 각각 다릅니다. 귀한 금그릇 은그릇도 필요하지만 천한 질그릇도 필요합니다. 큰 대접도 필요하지만 종지 같은 작은 그릇도 필요합니다. 남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교만할 것도 없고 열등감을 가질 것도 없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자기 몫의 길을 열심히 가면 될 뿐입니다. 자기대로의 소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남과 비교해서 일희일비(一喜一悲)에 쉽게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은, ‘영혼의 양식, 생명의 양식’일수록 오물이 묻은 ‘더러운’ 금그릇보다는 천해도 ‘깨끗한’ 질그릇에 담긴다는 그것입니다. 세속에 오염된 말씀을 먹으면 영혼 내지 생명이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금언이 있지요?
그렇듯 하나님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자는 ‘토끼’ 같은 세상의 좋은 평가나 멸시나 천대나 비난이나 박해 같은 나쁜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거기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순례자는 이기적인 세상의 상식이나 속물적 기준에 매여서 거기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에게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자하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이 되레 개들이 짖고 돼지들이 설쳐대는 이방지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들이 짖어도 나그네는 제 길을 간다”는 속언이 또한 있지요? 영원한 본향을 알고 가는 나그네는 확실한 목표가 있기에 기쁘게, 의연하게 제 길을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길을 가고 있는데,
길가의 어느 집 안에서 개가 먼저 알아보고 저를 향해 마구 짖더라고요.
그래서 그 개에게 들으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사람은 잘 봤다. 내가 길만 벗어나면, 죄인이고 속물이고 도둑놈이지.
네 주인집 잘 지켜라. 너도 네 몫의 밥값은 해야지.”
그러자 그 개가 나를 향해 더 사납게 짖더라고요.
그러나 그런 저의 말 자체가 되레 저에게 여유를 주고, 저를 향해 사납게 짖어대는 개가 되레 귀엽고(?) 재미있게까지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하는 저는 제 ‘주인집’을 저 개 만큼도 충성스럽게 지키지 못하는 분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제가 젊은 날 선한 영향을 받았던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님 같은 분은 “세상의 멸시나 천대를 꿀보다 더 달게 여기게 해주십시오”라고 주님께 기도했고, 또한 그렇게 실천하는 삶을 통해 낮은 곳에서 낮은 마음으로 헌신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나라로 돌아가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세상의 멸시나 천대를 꿀보다 더 달게’ 여길 수 있다면, 진실로 복이 있고 여유가 있고 자유로운 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좇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온통 이기적이고 속물적이고 경쟁적인 가치관이나 상식이 지배하는 이 세상 내지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로마서12:2), 때론 ‘미친 놈’이나 ‘이상한 놈’이나 ‘별난 놈’이나 ‘내놓은 놈’이라는 멸시나 천대도 받을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이권이나 실리를 챙기지 못하고 손해만 보거나 때론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돌려대는’ 그래서 자존심도 없는 ‘바보’ 내지 ‘어리석은 놈’이라는 손가락질이나 비웃음도 ‘꿀보다 더 달게’ 받아먹을 수도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담대한’ 하나님의 능력이자 성숙한 신앙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의 헌신적 삶이나 이타적 진실이 하나님의 때가 되면 되레 ‘세상의 빛’이자 ‘세상의 소금’으로 인정 및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기적인 행세나 탐욕이나 주류 내지 제도권이라는 기득권 획득에 영악하도록 ‘담대한’ 것이 진정한 신앙이나 승리는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나 그런 신앙은 하나님나라가 아닌, 세상의 그것을 역시 선망하며 ‘달려가는’ 대중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세상의 어둠’이나 ‘세상의 속물’이라는 유해한 비난이나 비판으로 증명이 될 뿐입니다. 그런 성공이나 능력 자체가 진정한 ‘의의 면류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 바울 등이 ‘달려간’ 올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는 그런 대중들에 의해서 점철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도 그랬지요? 역사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진보 및 진행된다고. 하나님의 구속사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진보 및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몫의 ‘십자가가 없는’ 명사들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 생명이나 가치가 짧기 마련입니다.
각설하고,
아무튼 그렇게 믿음이나 은사의 분량은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향하여’ 달려갈 길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트랙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동일해야만 합니다.
그럴 것이 저 ‘달려갈 길’ 곧 헬라어 ‘드로모스’는 ‘코스, 경주’를 의미합니다. 마라톤선수가 열심히 달려서 일등을 해도 마라톤코스에서 벗어난 그것이라면 그 승리는 무효가 되고 맙니다. 무익한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하나님의 정의 내지 공의와 사랑이라는 ‘코스’를 벗어나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코스’를 벗어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자 그리스도의 길인 “기록된 (성경)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린도전서4:6)고 당부했습니다.
그 올바른 코스를 벗어나 세상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그 길이 바로 미혹이자 허무이자 불행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이 아닙니다. 신학이나 지식이 없는 민족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선민(選民)이라고 자부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실패한 이스라엘’을 사도 바울은 그 요인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이스라엘)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10:2-3)
자기 중심의 ‘열심’은 대단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코스’를 벗어난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열심’이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기서 ‘자기 의’는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자기의 의로운 행위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과 구원을 얻게 된다’는 교리이고, ‘하나님의 의’는 ‘이신득의(以信得義)’라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구원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율법주의만이 아닌, 이기적인 성공이나 세상적 탐욕에의 추구나 그 합리화에 대한 ‘열심’이나 오늘의 시대에 팽배한 자유주의 신학이나 다원주의 신앙에의 ‘열심’이나 ‘다른 복음’을 신봉하는 이른바 ‘이단성’이 있는 집단이나 혼합 종교 등의 ‘열심’에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저 모든 영역에서 특정 인간이나 자기 중심의 모든 ‘열심’은 그 끝이 결국 죽음처럼 허무하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초상집에 가보세요. 영웅호걸이었을지라도 거기서 증명되는 절대가치는 흘러간 일개 구름처럼 다만 덧없는 인간의 허무일 뿐입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오직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이라는 남을 사랑하며 살리고자 했던 고귀한 기억, 그것입니다.
따라서 금세를 위해서도 내세를 위해서도,
끝이 좋은 인생은 실로 복이 있는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순교의 때를 앞에 두고 비로소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저 ‘마치다’ 곧 헬라어 ‘텔레오’는
‘완료하다, 성취하다’의 의미인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최후의 말씀
곧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요한복음19:30)와
동일한 언어입니다. 어형 변화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여기서 잠깐 딴죽을 걸어봅시다.
신실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성령으로 잉태 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자 ‘참 인간이자 참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 이루었다’ 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 가운데서 태어난 그래서 원죄와 자범죄를 가진 사도 바울이, 우리와 죄성과 성정이 똑같은 인간인 사도 바울이 감히 ‘다 이루었다’고, ‘다 마쳤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바울처럼 ‘죄인의 괴수’인 우리도 각자에게 세상에서 주어진 자기 몫의 사명을 ‘다 마치고’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도다.-
마치 마라톤경주를 마친 후, 승리의 월계관
곧 ‘의의 면류관’을 이미 쓰고 소감을 밝히는 것 같은,
남다른 고난의 사도이자 순교자인 바울의 저 담대한 고백 앞에서,
제가 여전히 부끄러워지는 것은 제 신앙양심이 깨인 때문일까요? 둔해진 때문일까요?
한 해의 끝은 또 다른 새해의 시작이 됩니다.
한 세상의 끝은 또 다른 내세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의 ‘선한 싸움’이나 ‘달려갈 길’이 올바르고
시종여일(始終如一)해야 할 필연이 과연 거기 있습니다.
(Ω)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과 '마음의 체온'을 위하여 (0) | 2013.12.30 |
---|---|
성탄절과 '성령 잉태'의 신비 (0) | 2013.12.23 |
넬슨 만델라의 '거룩한 승리'의 비결 (0) | 2013.12.09 |
아인슈타인의 유언과 교황의 생언(生言) (0) | 2013.12.04 |
12월, 거리의 풍경 (0) | 2013.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