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몸과 '마음의 체온'을 위하여

이형선 2013. 12. 30. 12:51

 

파스칼의 ‘팡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남에게 친절하거나 어질게 대하지 말라.

 보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어진 마음으로 대한다.

 왜냐하면 어진 마음 자체가

 자기에게 따뜻한 체온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해의 세밑에 울리는

구세군 냄비의 종소리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알게 모르게 손길과 성의를 보태는

순수하고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늘의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자체가 또한 스스로에게

따뜻한 ‘마음의 체온’이 되기 때문입니다.

 

 

20세기를 살다간, ‘인도의 성자’라고도 불리고

‘인도의 사도 바울’이라고도 불리는

썬다 싱이 체험했던 실화가 다시 생각납니다.

 

‘시크교도’ 집안에서 자랐고 그 역시 철저한 시크교도였기에

학창시절에 성경을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던 그는,

이후 극심한 종교적 갈등을 앓으며 차라리 자살하고자 하는

혼돈과 절망의 지경에까지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진실한 구도(求道)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현현을 체험하고,

‘다메섹 신비체험’을 했던 사도 바울처럼 이후 개종합니다.

인간 우리의 금세와 내세를 진실로 살리는

참 진리이자 참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런 그가 혹한과 거센 눈보라가

맹위를 떨치는 어느 날,

가는 방향이 같은 낯선 여행객을 만나

길동무삼아 히말라야 산맥지대인

네팔의 어느 산길을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거칠게 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산길을 어렵게 걷고 있을 때, 그들은 산비탈의 눈밭에

쓰러져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미 의식은 잃었지만 그러나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썬다 싱이 동행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곧 죽고 말 것이요.”

그러나 동행인의 반응은 세상이라는 환경 내지

여건의 영향을 받아서 이미 얼어 있었습니다.

 “미쳤소? 내 한 몸도 죽을지 살지 모르는 이 판국에

  누굴 도와서 살리겠다고 나선단 말이오.”

 

 

그리고 그 동행인은 그냥 앞서서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썬다 싱은 쓰러진 그 사람을 등에 업고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눈 쌓인 산길을 걷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끙끙거리며 걷는 썬다 싱은

춥기는커녕 되레 온 몸에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땀과 그 체온이 되레 두 사람을 함께 살려줍니다.

등에 업힌 사람의 몸을 녹여서 의식을 회복하게 만들어주었고

그래서 그 체온으로 썬다 싱 역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업고 업힌 그들이 마침내 마을이

저쯤으로 바라보이는 길목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거기서 눈길 위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썬다 싱과 동행하다가 앞서간 그 행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의 체온’을 잃은 그는 그래서 되레

‘몸의 체온’조차 잃고 죽음의 길을 간 것이겠지요.

 

 

각설하고,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몸의 체온은

늘 따뜻한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합니다.

그래야만 되레 자기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너무 높아도 병이고, 너무 낮아도 병입니다.

자기만 너무 잘 먹어도 병이고,

자기만 너무 못 먹어도 병입니다.

우리 ‘마음의 체온’도 역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기심이나 허영이나 각종 탐심 등으로

마음의 체온이 너무 높아도 병이고,

염려나 불안이나 낙심이나 무관심 등으로

그것이 너무 낮아도 병인 것처럼 말입니다.

오직 ‘어진 마음’ 곧 ‘선한 마음’을 가질 때

자기의 몸도 심령도 되레 ‘따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저 파스칼이 말하는 ‘어진 마음’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일까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립보서5:2)입니다.

저 썬다 싱이 이기적인 자기를 부인하고 품었던

그 ‘어진 마음’의 정체가 바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16:25)

 

 

과연 ‘생명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그런 말씀은 건전한 우리의 마음의 체온을 위해서

나아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리라.-(마가복음11:25)

 

 

우리의 과거의 죄와 허물을 서로 용서하라는 것.

우리가 우리의 묵은 죄와 허물을 서로 용서할 때,

생사화복의 주인이자 새해의 주인이신 하나님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사로운 감정의 언행들은 물론이고,

자기에게 큰 곤욕이나 상처를 준 악연이나

원수조차도 용서하며 심령의 체온 내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의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상대인 악연이나 원수가 몰라줘도 상관없습니다.

괴롭고 힘들어도 용서는 인간 우리의 몫이고

심판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몫이니까,

전적으로 심판은 그분에게 맡기고

인간 우리의 몫에 ‘최선’을 다하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내지 심령 깊은 곳까지

능히 통찰하시는 분이니까요.

인간 자기가 나서서 하나님처럼 심판하려고

앞서 갈 때, 되레 저 ‘행인’처럼 먼저 죽고 맙니다.

 

 

그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최선의 삶’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희생양’의 삶,

인간 우리의 ‘저주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곤경에 처한 ‘이웃’을 등에 업고 가는

저 썬다 싱의 삶,

그것이 바로 ‘최선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길을 가다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다”는 속언이 있지요?

‘70억’이라는 바다의 모래알 같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어제 히말라야 산길에서, 오늘 서울의 거리에서,

하나님이 ‘이웃’이라는 인연으로 만나게 해주시는

그 모든 크고 작은 섭리 역사 앞에서, 그 모든

달고 쓴 만남이나 헤어짐이나 손익의 인연 앞에서,

우리가 진실로 복이 있는 우리가 되기 위하여

자기가 진실로 복이 있는 자기가 되기 위하여,

‘어진 마음’으로 곧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말씀으로 실천해야 할 구원의 비밀이 거기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체온’이니까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지금 우리의 마음의 ‘체온’이나 몸의 체온은

과연 시쳇말 그대로 "안녕들 하실까요?"

너무 이기적으로 얼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해에,

몸도 마음도 더욱 건강하시고,

하늘의 참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선한 일에 더욱 힘을 쓰는’

진실한 믿음과 진실한 사랑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