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새해’라는
인생 마라톤 경주의 출발지점에 섰습니다.
따라서 달려갈 길에 대한
목표의식의 점검이 필요한 때입니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푯대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살리는 ‘강물’은
‘바다’라는 분명한 푯대가 있기에
그래서 되레 살아있고 그래서 오늘도 보다
낮은 곳을 향해 유유히 흘러가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가장 올바른 신앙선배인 사도 바울이 고백한,
그의 지고한 푯대의식을 다시 들어봅시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3:11-14)
세상을 사는 우리의 ‘푯대’ 곧 새해의 꿈이나 소원은
대부분 남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나
남보다 더 높고 더 큰일을 하는 신분상승이나
계층이동에 성공해서, ‘먼저 내가 사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고,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쳐도 그것이 이기적인 성공이라면 오히려
자기나 자기가족이나 이웃들을 되레 많은 고통과
파멸로 인도하는 ‘공해의 열매’를 맺을 뿐입니다.
심지어 대형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한답시고
거액의 대출까지 받아서 지은 교회건물들이
결국 부도가 나서 경매처분을 당하는 사례가
전국적으로 수십 수백 건에 이르는 현실을 보면,
그것조차도 인간 자기의 야심이나 탐심이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일’은 결코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적극사고’나 ‘성공철학’ 유형의
그것으로 우리의 허파에 신기루 같은 바람을 넣지 않습니다.
우리의 잠재적 욕망이나 야심을 자극하지도 않고, 충동질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는 그래서 진실로 살리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되레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로마서12:2-3)
지난날 제가 의정부에 살면서,
‘무화과나무’라는 월간소책자를 만들며 문서선교사역을 하고 있을 때의 어느 날. 서울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모 대형교회의 ‘남(男)선교회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대학병원(원목실)에서 ‘무화과나무’ 책자를 몇 번 본 적이 있다”면서 저의 신상에 관해 물으신 후, “교회에서 좀 만나자”는 언질을 주셨습니다.
월간소책자라지만 브로슈어 같은 흑백의 볼품없는 선교지를 혼자 끙끙거리며 어렵게 발간하고 있던 저에게 그런 제의는 대단히 좋은 기회일 수 있었습니다. 대형교회에 소속되어 사역을 하면 보다 ‘큰일’을 할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터이니까요.
그러나 당시 기도 및 묵상하는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바로 저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은 다르다”는 저 말씀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찾아가 뵙지는 않았습니다. 때론 어렵고 고달프더라도 보행장애인인 제 ‘믿음의 분량’ 내지 ‘분수’에 맞는 내 몫의 길, 내 소신의 길을 조용히 가자는 마음에서 그랬습니다.
아울러 그때 마더 테레사의 이런 고백을 함께 묵상하면서 평안의 은혜를 또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큰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크게 할 뿐입니다.-
작은 자를 그리스도처럼 섬기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되레 큰일이고, 작은 일을 그리스도의 일처럼 올바르고 선하게 행하되 때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행하는 일이 되레 큰일이라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런 마더 테레사나 저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포한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그 어떤 ‘위인’이나 ‘거물’들보다 되레 더 ‘큰일’을 하고, 더 참된 ‘성공’을 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참 능력의 사람들이자 성령(聖靈)의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따라서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꿈이나 소원을 위해서 되레 더 크고 중요한 ‘구원의 말씀’에 먼저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저기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생명을 먼저 구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먼저 부활의 생명을 구하는 자는 먼저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산 자가 부활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죽은 자만이 다시 살 수 있는 일이니까요. 물론 부활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은 종말적인 ‘부활(復活)’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경은 현재적으로도, 사람이 스스로 ‘살아 있다 쳐도 이미 죽은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영(靈)이자 하나님의 의(義)를 잃어버리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영적 생명이 죽어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 그 길에서 타락한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우리 모두는 그래서 태생적으로 영혼이 타락한 사람들이자 죽어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또한 죽음으로 가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참 복된 인생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새 언약(新約)’이자 ‘인류의 새 조상’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현재적으로도 거듭나야 하고, 종말적으로도 거듭나야 하는 ‘부활’이라는 절대생명과 절대가치관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역사상 그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없고, 성자도 없고, 목회자도 없고, 선교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얻었다’거나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의 삶을 늘 부족한 미완성의 삶으로 알고, 늘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 마라톤선수였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잡히지도 않았고, 현실에 안주하지도 자만 내지 교만하지도 않았습니다. 늘 미래지향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진실로 그는 지극히 겸손하고 사심도 없는 '작은 자 중의 작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진리에 대한 체험적 확신과 소신에는 철저한, 그래서 차라리 순교를 당해 비참하게 죽을지언정 인간을 참으로 구원하는 복음에 대한 확신만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크고 작은 과거의 성취나 성공이나 미련도 잊어버리고, 실패나 아픔이나 상처도 잊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지도 자만하지도 않고, 미래지향적으로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나 세상 나라의 가치관을 부인하고, 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righteousness)를 구하는’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의 그 모범 그 푯대를 향해서 말입니다.
그것은 먼저 ‘자기가 죽는 법’에 대한 구도이자 성찰일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사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죽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녕 ‘큰일’이고,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의 성숙을 위한 영성의 비밀이 오직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에콰도르에서 사역했던 ‘주의 종’ 짐 엘리어트가 이런 말을 했었지요.
-죽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사는 법 또한 배우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먼저 ‘죽은 법’을 구하며 열심히 살다보면, 세상살이에 필요한 우리의 모든 양식이나 꿈이나 소원도 부활 내지 영원한 생명의 차원에서 보다 가치 있고 보다 알차게 더해주실 것이고, 그래서 보다 복되게 ‘사는 법’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내 것’이라고 자랑하는 각종 소유도 많지만,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소유이자 최고의 축복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및 그리스도를 자기 심령에 ‘내 것’으로 소유하는 그 자체입니다. 존재(存在) 그 자체라는 것. 그것이 세상의 각종 좋다는 모든 소유보다 ‘더 낫고 영구한 소유(lasting possessions)’(히브리서10:34)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영구한 소유’는 ‘들을 귀’ 있는 자들의 몫이자 복이 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실패한 자들을 구원하고,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죽은 시체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 등을 현재적으로 부활시키고,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종말적으로 부활 및 승천하신 분입니다. ‘부활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분이자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실패해도 존재 자체인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그것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미래에 더 큰 하늘의 성공이 주어질 것입니다. 병들어도 존재 자체인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그것은 결코 병고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처럼 되레 ‘하나님의 은혜’(고린도후서12:9)가 됩니다.
죽어도 존재 자체인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그것은 결코 죽음이 아닙니다. 역시 사도 바울의 증언처럼 되레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빌립보서1:23)이자 안식이자 낙원의 삶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永生)’이자 ‘영원한 축복’이라는 절대가치이자 영성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푯대’이자 우리의 푯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실패해도 다시 살고,
병들어도 다시 살고, 죽어도 다시 사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부활의 생명’과,
세상의 달고 쓴 모든 범사를
능히 이기는 ‘그리스도의 평안’이라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참 복이,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게 주어지는 새해가 될 수 있기를!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편31:15)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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