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는 열렸지만,
‘동장군(冬將軍)’이 목하 세상 한가운데서
칼바람을 휘날리며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바뀌는 자연의 시간
내지 계절의 시간 그 위세에 대단한 의미와
가치를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명언처럼,
‘십일’ 내지 ‘한철’이라는 자연의 시간이 지나면
‘꽃’도 ‘겉사람’도 지는 것처럼, 동장군의 저 위세도
사라질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라지는 것이 정작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새해도 새 사람도 새 삶도
‘속사람’이 말씀 곧 진리에 열리고 깨이는
‘의미의 시간’에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실인즉 시간이나 때(time)를 의미하는
헬라어의 두 다른 언어의 구별이 그런 것처럼,
누구에게나 다 주어지는 일 년 열두 달이라는
‘크로노스’ 곧 ‘자연의 시간’ 그 자체가
정작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여느 사람이나 동물 내지 생물 같은
‘자연의 생명’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자체가 정작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에게 정작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의미의 시간’인 ‘카이로스’에 있고,
‘의미의 생명’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속사람의 영성(靈性)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일이나 독립기념일이나 결혼기념일 등도 우리
인생에게 여느 날과는 구별된 중요한 ‘의미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컨대 결혼기념일을 최고급 호텔에서
호화롭게 치렀다 쳐도, 서로 사랑하며 서로 아끼며
오래 살지 못하고 반목하거나 혹은 이혼을 해버린다면
그런 기념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듯 참 ‘의미의 시간’은 서로 사랑하며
서로 아끼는 삶 그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한 몸’이기에 ‘주 안에서’
서로 아끼는 숭고한 차원의 영적 사랑 곧 ‘아가페’의 삶에
열릴 때 비로소 참 ‘의미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립기념일도 그렇습니다. 광복절을 아무리 성대하게
치렀다 쳐도 이웃이나 동포나 민족끼리 서로 사랑하며
상생 및 공존하지 못하고, 반목 대립 증오나 빈부양극화
등에 빠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태초의 창조 역사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 등으로 현실도 미래도
암울한 땅에 “빛이 있으라”(창세기1:3)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망이 시작된 것처럼,
우리의 새해 역시 그렇게 먼저 말씀으로
시작해야 할 필연이 거기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1:1)
세상에 나온 우리 인생 자체의 시작도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궁에서 나온 피조물들일 뿐입니다.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 누구 있습니까?
외람되지 않는다면, 저 말씀을 이렇게 바꿔봅시다.
-네 출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라는 세상의 만물도,
‘출생에’라는 인간 개개인의 존재도
그 진정한 생명이자 주인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주인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열심히 주인 행세하며
세상을 떠도는 ‘염소나 개나 돼지’는
그래서 되레 한세상 내내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 행태 자체가 ‘미혹’이자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생물도 자동차도 그것을 만든 자가 그것을 가장 잘 알고,
그것을 고치는 일도, 그것을 가치 있게 살리는 길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작 복되고 가치 있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 성경의 말씀과 늘 함께 하는 삶에 더욱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열심을 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고 아울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11:25-26)
그렇습니다.
‘무릇 살아서 예수를 믿는 자’ 곧 성경 계시의 말씀을 믿는 자는 세상이 꽁꽁 어는 겨울이 와도 삽니다. 심지어 죽어도 삽니다.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영원히 삽니다. 위기가 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때나 그 자리가 되레 삶의 때나 그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때나 그 자리가 되레 부활의 때나 그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한복음11:27)
따라서 그렇게 진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그 시간 그 때가 인생 우리에게 가장 복이 있는 참 구원의 시간이자 참 의미의 시간인 영적 ‘카이로스’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거창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체험적으로 분명하게 아는 것은, 제가 인생을 살아볼수록, 제 양심에 빛이 들어올수록, 인간 ‘나’ 혹은 ‘자기(自己)’라는 타락한 그래서 허무한 이것은 죽어야한다는 그것입니다. 태생적으로, 근원적으로, 이기적인 죄성(罪性)에 갇힌 ‘자기’라는 ‘혈과 육’으로는 인간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인간 나나 우리가 선행을 하고, 때론 고행을 하는 종교적 수행 그 자체도 물론 보다 진실하고 보다 큰 깨달음을 얻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고귀한 노력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인간 나나 우리의 노력이나 공적 정도로는 어차피 참 구원에는 한계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때론 내가 전혀 원하지 않아도 악한 사념(邪念)이나 부조리한 정념(情念)이나 염려나 불안 등의 막연한 죄책감 같은 타성이 내 속에서 공중의 새처럼 제멋대로 날아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혈과 육의 타성은 성경적 표현에 의하면, ‘뱀’ 곧 ‘사탄’과 ‘영적 간음’한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의 죄성이요, 아우 아벨을 시기해서 미워하다가 마침내 돌로 쳐서 죽여버린 카인의 죄성이요, 우리 조상들 및 부모님을 통해 대대로 흘러내려온 죄성입니다. 그런 ‘살인자’와 ‘간음자’의 악한 피가 내 속에 진하게 흐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하고 진한 내 혈과 육이 윤리 도덕이나 선행이나 고행이나 수행 정도로 치유 및 구원될 수 있을 것인가? 어림없더라는 것입니다. 할례나 물세례 정도로 치유 및 구원될 수 있을 것인가? 어림없더라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살인자, 간음자’라는 ‘혈과 육’은 죽어야 합니다. 응당 죽어야할 뿐입니다.
그렇게 인간 나의 타락한 죄성(罪性)과 실존적 정체성 그리고 그 한계를 절감하게 되자, 신정통주의 신학의 태두이자 거두인 칼 바르트의 표현처럼 ‘거룩한 탄식(Holy Sadness)’이 이렇게 절로 토설되더라고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a wretched man)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24)
차라리 ‘비참한 사망의 몸’인줄 알았으면 응당 죽어야지요. 그렇다고 내가 자살해서 해결이 될 일도 아닙니다. 그럴수록 절대 필요한 존재는 ‘희생양’입니다. 대속(代贖) 곧 내 대신 죽어야할 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저주받은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직접 고행과 수행을 했던 세례 요한의 계시적 고백이자 체험적 고백처럼, 할례나 물세례 차원이 아닌,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분”(누가복음3:16)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런 '그리스도 안에', 과거적인 믿음이 아닌 현재적인 믿음을 가지고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우리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라는 '흠없는 온전한 희생제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 앞에 현재적으로 설 수 있고, 나나 우리가 늘 거듭난 참인간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제 믿음이 좋았던 사람도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그 길을 벗어나버리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는 다시 단절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자 '그리스도의 비밀'이더라는 것입니다.
젊은 날 문학청년이었던 저는,
차라리 자살해서 죽고 싶은 저의 암울하고 운명적인 ‘사망의 골짜기’에서 그것을 뼈저리도록 절감하고 이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도 중심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인간 자기의 노력이나 수행이나 공적이나 지식 등 그 하찮고 허무한 한계를 절감하는 그래서 자기가 깨져버리는 ‘고난의 골짜기’ 내지 ‘사망의 골짜기’에서의 철저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은근한 자기 교만이나 자기 미혹에 갇혀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밀한 구원과 그 ‘잔치의 맛’을 끝내 보지 못하기 마련이니까요.
예컨대 암(癌) 질환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기’라는 인간 그 대단한 권세도 재물도 지식도 선행도 수행도 다 별것 아닙니다. 중요한 숙제는, 인생 우리 모두는 어차피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고르의 언급이자 저서 제목 그대로〈죽음에 이른 병〉이라는 암(癌) 질환에 걸려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요.
물론 키엘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른 병’은,
암 질환이나 경제적 빈곤이나 신체장애 같은 불운한 운명이나 고통 같은 ‘혈과 육의 질환’이 아닙니다. ‘인간이 신을 떠나있는 상태, 신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절망의 상태’이자 인간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는 ‘인간 자기 소외의 상태’이자 그 자체가 암 질환 같은 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엘케고르는 저술을 통해 유언처럼 진정한 치유이자 구원은, “인간 각자가 신(神) 앞에 서는 일”이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각설하고,
오늘의 배부른 일부 “기독교 교회가 세속화되었고” 그래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및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막말로 특정교회를 위해서나 특정목회자를 위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기독교’라는 종교 내지 교파 자체보다도 우리 ‘인간 각자가 신 앞에 서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진짜’도 있고 ‘짝퉁’도 있기 마련 아닙니까. ‘선한 목자’도 있고 ‘삯꾼목자’도 있고, ‘양’도 있고 ‘염소’도 있고 ‘양의 탈을 쓴 이리’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상식 정도는 저도 이미 알고 있고, 하나님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런 세속의 풍조에 너무 동화되어 기독교 자체를 부정적으로 비난하거나, 성경에 계시된 사람이 참사람답게 살 수 있는 복된 영성의 비밀에 대해 무조건 외면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복된 인간 자기의 구원과 평안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실한 삶은, 오직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신앙의 관계에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생과 죽음 자체부터가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육신을 입고’
세상에 ‘희생양’으로 와야만 했던, 인간 구원의 그 심오한
비밀을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이르시되 은혜 베풀 때(*카이로스)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은 만한 때(*카이로스)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6:2)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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