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義)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23:1-4)
* * *
고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에
큰 위로와 평안과 소망을 주고 있는 ‘위대한 안식의 시’입니다.
저자 다윗은 결코 평탄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일선에서 적장인 거인 골리앗의 위세에 주눅이 들어 전전긍긍하는 이스라엘군을 구하기 위해, 당시 현역군인이었던 친형님들도 무시 내지 비웃던 막내이자 일개 미천한 목동(牧童)이었지만 그러나 “여호와(하나님)의 이름으로” 감히 맞서서 ‘물매의 돌’ 하나로 적장 골리앗을 때려눕혀버렸던 다윗. 그는 그래서 일약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합니다. 그러나 그래서 또한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전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千千)이요 다윗은 만만(萬萬)이로다”(사무엘상18:7)라고 노래한,
당시 백성들의 여론을 자기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자 위기로 인식하고, 점차 정적으로 부상하는 다윗을 시기 및 살해하려고 했던 당대 사울 왕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십여 년 동안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전전하며 살아야했던 것입니다. 그 노정에서 이방의 땅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할 때엔,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하는 ‘미치광이’(사무엘상21:15) 행세를 하기까지도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은 이후,
다윗은 예정되었던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순종해서 그의 출신인 ‘유다지파의 왕’이 되어 7년 반 동안 다스리다가 마침내 그의 나이 30세에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러나 왕이 되었다고 해서 이스라엘 왕국이나 다윗 왕에게 안정과 평화와 안식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대는 지정학적으로 주변의 이방 국가들과 끊임없는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피를 많이 흘려야 하는 전쟁’이라는 또 다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위대한 안식의 시’를 저술할 수 있었던 저력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저 한 마디의 ‘신앙고백’처럼,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믿고 의지했다는 그것입니다. 그것은 유일한 그리고 절대적인 신앙의 관계이자 인격의 관계이자 그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너의 목자’도 아니고, 심지어 ‘우리의 목자’도 아닙니다. 먼저 일대 일의 관계인 ‘나의 목자(牧者)’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누구의 목자입니까?
염소들의 목자입니까? 여우나 늑대들의 목자입니까?
뱀이나 사자나 호랑이들의 목자입니까?
스스로 공격용 강한 뿔이나 독이빨이 있고, 강한 힘과 능력이 있다는 저들에게는 목자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되레 목자나 ‘양식을 주는 조련사’를 물어 죽여버리기까지 합니다. 목자는 오직 양(羊)들에게 필요합니다. 양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오직 목자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갈 뿐입니다. 자기의 연약함이나 무력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자기의 한계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미 타락한’ 그래서 염소나 여우나 늑대나 뱀 같은 우리의 정체성 내지 성정을 자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방향을 돌려 ‘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대중가요에 이런 가사가 있더군요.
-나는 네가 좋아서 순한 양이 되었지.-
옳습니다. 진리입니다.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자기를 부인하고 연인의 ‘순한 양’이 될 수 있습니다. 숙제는 ‘에로스’라는 그 ‘사랑’이 변함없이 얼마나 지속되느냐, 거기 있겠지요. ‘에로스’라는 ‘사랑’은 쾌락이나 이해득실에 따라 금세 돌아서서 ‘악한 여우’나 ‘악한 늑대’나 심지어 ‘원수’로까지 돌변하는 사례도 다반사이니까요. 따라서 그것이 ‘영원한 사랑’도, 중심으로 변화된 참 ‘순한 양’의 모습도 아닙니다.
감리교회 창시자이기도 한,
신앙위인 죤 웨슬리 목사가 이런 말을 했었지요.
-나는 모든 것을,
그것이 영원의 차원(eternity)에서
어떤 값어치가 있을 것인가
하는 기준에서 오직 평가한다.-
따라서 ‘네가 좋은 사랑’도 ‘순한 양’의 모습도 ‘영원의 차원’ 내지 ‘영원의 세계’의 생명을 가질 때 비로소 남녀 서로의 사랑이 진정으로 값어치가 있고, 그래서 서로 참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남녀 각자의 심령이 ‘아가페’라는 ‘거룩한 사랑’에 열리고 그 영적 연인 내지 ‘신랑인 그리스도’ 앞에서 순한 양이 될 수 있을 때, 남녀의 사랑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섬기는 참 순한 양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로스’라는 인간적 사랑의 부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아가페’라는 거룩하고 완전한 신적 사랑으로 채워지고 그래서 극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구원이나
가정이나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먼저,
-나는 하나님이 좋아서 순한 양이 되었지-,
-나는 그리스도가 좋아서 순한 양이 되었지-,
그렇게 노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선한 목자’(요한복음10:14)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먼저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자 복된 인생의 삶과 목적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자기 털이 죄다 깎여도 저항할 줄도 울 줄도
모른 채 되레 “속옷조차 가져가라”는 듯이 다만 잠잠한,
차라리 어리석은 바보 같은 양은 목자가 없으면 죽습니다.
스스로 헤매다가 기갈로 죽거나 다른 짐승들에게 먹혀서 죽을 뿐입니다. 따라서 양에게 목자는 자기의 생존 자체이자 절대존재 자체입니다. ‘나의 목자’ 곧 ‘선한 목자’의 길 곧 ‘그리스도의 길’만이 양이 진정으로 안전할 수 있고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구원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강하고 현명해서 ‘자기의 길’을 가는 염소나 여우나 늑대나 사자나 호랑이 등의 길을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런 데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이 '영원의 차원(eternity)에서 보면' 하등의 값어치가 없다는 것 정도는 저도 인생 및 역사의 경험이나 그들의 열매를 통해서 익히 압니다. 그리고 제 믿음이나 실천하는 삶이 부족해서 늘 문제이지, ‘그리스도의 길’은 인간 구원을 위해 완전하게 ‘다 이루어진’ 길이라고 저 역시 확신합니다. ‘그리스도의 길’에 무엇인가가 부족해서 혼합종교화식으로 인간적인 가감(加減)을 시도한다는 것은 되레 큰 미혹이자 큰 교만이더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작은 자 중의 작은 자’라는
곧 ‘작은 양 중의 작은 양‘이라는 인간 자기의
정체성에 열린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1:21)
인간 내 사는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것. 인간 내 생존 자체가 그리스도 덕분이고,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목자’이고, ‘그리스도의 사명’이 또한 ‘나의 사명’이라는 것.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만리 장천 저 멀리에 계신 추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무서운 존재나 두려운 존재도 아닙니다. 물론 ‘죄악을 일삼는’ 개나 돼지나 이리나 늑대들에게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되겠지요. 설령 제가 심판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공의(公義) 내지 사회적 정의를 위해서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린 양’ 내지 ‘작은 양’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죽은 신도 아니고 죽은 존재도 아닙니다. 오늘도 살아계시기에 선한 목자입니다. 죽은 목자는 결코 오늘의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영적 맹인인 목자’도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헬레니즘이라는 인간의 지혜인, 희랍신화에 나오는 ‘하데스’ 곧 ‘플루토스’라는 별명을 가진 ‘재물(財寶)의 신’도 ‘맹인’이기에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사탄 내지 악령의 세력이 그런 것처럼 공의도 불의도 구별하지 못하고, 선인도 악인도 분별하지 못하고, 맹인의 눈으로 제멋대로 재물을 나눠주기 때문에 세상에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이라는 불공평과 양극화가 늘 병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오직 양들의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살리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금세와 내세를 아울러 살리는 복락원과 하늘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양의 무리들이 공평하고 평등하게 먹고 마시며 공존 및 상생하는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에 자본주의의 큰 병폐인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양극화는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의 세계(eternity)'라는 영안(靈眼)과 그 가치에 진짜로 열리면, 부자의 소유나 자본주의적 탐욕은 나누고 치유해야 할 심각한 병증(病症)이지 결코 하나님나라의 가치도 축복도 아닌 것입니다.
각설하고,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또한 ‘어리석은 양’ 같은 우리가 길을 잃거나 운명적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뒤에 두고 그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하고자 찾아나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내 양’ 곧 ‘하나님의 양’이기에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골짜기인 십자가에서, 저주의 십자가에서, 대신 죽더라도 끝까지 양들의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저 다윗의 고백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He restores my soul)”에서,
‘소생시키다’는 히브리어 ‘슈브’는 여기서 ‘회복시키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또한 ‘돌이키다, 다시 돌아오게 하다, 다시 돌아가게 하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회개’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우리가 설령 실족해서 그릇된 길, 탕자의 길, 미혹의 길이나 그런 골짜기를 헤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깨닫고 돌이키도록 친히 섭리 및 역사하셔서 "내 영혼이 회개하게 하시는" 그런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선한 목자’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회개할 마음이나 기회를 주실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겸손하게 자기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완악해져서 끝까지 교만한 자는 ‘선한 목자’가 스스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둔’ 염소나 여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는 누구나
‘나의 목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각각 다를 뿐이지요.
오늘 우리의 ‘나의 목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부모님? 스승님? 남편이나 아내? 자녀?
돈? 재벌? 대통령? TV? 스마트폰? 연예인? 스포츠 스타?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도 그 생명도 다 유한한 것.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그 값어치가 다 허무한 것.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세속사를 뛰어넘어
오늘도 들을 귀 있는 양들에게 자기 정체성과
‘대속적(代贖的) 희생’이라는 영원한 사랑의 가치를
이렇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는 아는 것이,
(하나님)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10:)
상대적으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나 정체성은 과연 ‘순한 양’들일까요?
뿔로 ‘선한 목자’나 ‘이웃’을 자꾸만 들이받는 ‘염소’들은 아닐까요?
중심 내지 본연의 자리에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이미 없는,
기업화되고 상품화되고 외형화된 인위적 신앙풍토는 아닐까요?
자기나 자기들끼리 차지하고 누릴 줄은 알아도,
‘목숨을 버려’ 희생할 줄은 전혀 모르는 염소나 ‘삯꾼 목자’들,
제발 ‘당신의 천국’이나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기를!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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