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의 일은 물론 아니지만,
요즈음은 사주나 팔자, 관상, 점괘 등을 보는
이른바 ‘운명철학관’이 더욱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경기의 흐름이 안 좋은 시기나 선거철이 다가오면 고객이
더욱 많아져서, ‘운명철학자’들의 주가가 높아진다면서요.
하긴 내로라하는 재계의 모모 거물급 명사들부터가 저들의
단골 고객이라는 것 정도는 이미 ‘잘 알려진 비밀’입니다.
‘운명(運命)’에 대한 국어사전의 해설은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인간을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월적인 힘,
또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길흉 화복.
타고난 운수나 수명.-
저는 ‘운명론’을 생각할 때마다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사주나 관상 등이 ‘동양철학’이니까 그래서 또 다른 동양인이 안티테제의
표상처럼 떠오르는 지도 모릅니다.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의
명재상이었던 맹상군(孟嘗君)이 바로 그 인물입니다.
사마천의「사기(史記」에 의하면,
맹상군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짐을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전영(田霙)은 제나라 위왕의 차남으로 재상이 되어 세 왕을 섬겼고, 재산도 ‘억만금’을 모은 부자입니다. 그러나 훗날 어른이 된 그의 아들 맹상군이 그에게 감히 직언 내지 고언을 올렸던 바처럼, 그의 “아버지는 억만금의 재산은 모았지만 인재들을 키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곁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없었고, 다만 입맛에 맡는 정상배들이나 첩들만 수두룩해서 슬하의 아들이 무려 40여명. 그 무렵, 사랑하지도 않은 천한 첩 하나가 또 한 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것도 길흉을 점치는 사주(四柱) 풀이에 의하면, 아주 불길한 5월 5일생.
전영은 다짜고짜 산모에게 명령합니다.
“아기를 내다 버려라!”
그러나 어미는 아기를 차마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이라는 이름으로 숨겨서 키웁니다.
아기가 소년으로 성장한 후에야 비로소 어미가 아비 전영에게 아이를 보여주자 전영은 버럭 역정을 냅니다.
“왜 버리지 않고 키웠느냐?”
어미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아들 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묻습니다.
“5월 5일에 태어난 아이니까 키우지 말고
내다버리라고 말씀하신 까닭이 무엇이지요?”
전영의 대답인즉 이렇습니다.
“5월 5일에 태어난 아이는 키가 문 높이만큼
자라면 부모를 죽인다고 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맹랑한 ‘운명론’이자 미신입니다.
남달리 영특한 아이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죽고 사는) 사람의 운명은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옵니까?
아니면 문 높이에서 받는 것이옵니까?”
말문이 탁 막힌 전영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아이가 다시 입을 엽니다.
“운명을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라면 아버지께서는 전혀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운명이 문 높이에서 오는 것이라면 문 높이를 올려버리면 될 것입니다.
누가 문 높이만큼 그 키가 커질 수 있겠습니까?”
아이의 그런 말과 지혜에 내심 감탄한 전영은 모자를 용서해주고, 훗날 사십여 명의 형들을 다 뒤로 하고, ‘문’ 곧 ‘맹상군’을 가문의 후계자로 세웁니다. 물론 맹산군은 훗날 부모를 죽인 일도 없었고, 되레 ‘억만금’의 재물을 다 풀어서 인재들을 키우고 그래서 가문과 이웃과 나라를 복되게 살리는, 지혜와 덕과 신의를 겸비한 큰 인물이 됩니다.
실로 ‘운명론’에 대한 일대 발상의 전환일 수 있는 저 소년 맹산군의 말은
동양적 ‘솔로몬의 지혜’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단한 인생의 지혜입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10:29)
그렇습니다.
미물인 참새를 포함한, 인간 우리 모두의 죽고 사는 ‘운명’의 문제는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최고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저 소년 맹산군의 말처럼, “운명을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라면 아버지는 전혀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설령 제가 내일 불행한 사고나 병으로 죽는다 쳐도 그것은 전혀 걱정 내지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그럴 것이 그 죽음은 그 불행한 사고나 병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죽도록 곧 하늘나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기에 발생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운명이란 ‘불행한 사건과 나와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생사(生死) 자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의식주 등 보다 작은 일상사에 얽힌 ‘운명’의 문제도
오직 하나님의 ‘최고 의지’에 의해 섭리 및 역사됩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느냐?-(누가복음12:24-25)
나아가 희비(喜悲)가 교차하는 우여곡절 내지 파란곡절이라는,
인생사 자체도 오직 하나님의 ‘최고 의지’에 의해 섭리 및 역사됩니다. 그런 ‘영(靈)’이자 ‘말씀’이신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던 다윗은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와 인자와 긍휼을 입으며’ 살았던,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다윗 왕이 압살롬의 반역사건에 밀려서,
왕궁을 떠나 참담한 모습으로 피난길을 가고 있을 때.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이 다윗 왕을 향해 돌을 던지며 ‘연하여 저주하는 시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전 ‘사울 왕의 집안 곧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니까 정치적 지파 감정이나 원한 때문에 퍼부은 저주일 뿐입니다. 억울한 다윗은 괘씸해서라도 동행했던 측근 ‘아비새 장군’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여, 당장 가서 “머리를 베어버리도록”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위기 때 되레 더 침착합니다. 그 ‘저주’를 ‘시므이와 나의 관계’로 받지 않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받아들입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사건에 밀려 도망길을 가고 있는 불행한 운명 그 자체 역시 ‘압살롬과 나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 나의 관계’로 묵묵히 받아들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오래 참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나를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랴.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하나님)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사무엘16:11-12)
과연 하나님은 그렇게 다윗에게 “선(善)으로 갚아주십니다.”
훗날 왕권을 회복해서 왕궁으로 귀환한 것입니다. 그렇게 ‘불행한 운명’을 이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행복한 운명’을 위해 저 이슈에 주목해야 합니다.
죽고 사는 운명 자체도, 도망 내지 피난길 같은 고난이나 저주 같은 삶의 ‘불행한 운명’도 여호와께서 ‘허락’ 내지 ‘명령’하심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역(His Part)’이자 권한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한 불행한 사고 자체나 상대방인 사람 자체에게 ‘원수’ 운운하며 미움이나 원한이나 증오나 복수의 칼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것. ‘악을 되레 선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오직 믿고,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지혜와 덕이 있는 구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인격으로서의 회개 내지 오래 참는 행동이나 삶은 ‘우리의 영역(Our Part)’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맹상군의 말로 풀어보자면,
“운명을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라면 아버지께서는 전혀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것은 겸손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하늘에 맡겨야할 ‘하나님의 영역(His Part)’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저 참새나 저 까마귀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운명이 문 높이에서 오는 것이라면 (*사람의 노력으로) 문 높이를 올려버리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Our Part)’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우리가 인위적인 노력이나 선한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고인이 된 작가 김동리 선생도 이런 말을 했지요.
-인간의 운명은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신(神)이 감응할 수 있는 노력에 의해서.-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역’은 저 맹상군의 교만한 아비 전영처럼
임의적으로 제멋대로 풀어서 자기 자식이나 ‘지극히 작은 자들’을 쉽게 버려버리기도 하고,
정작 스스로의 노력이나 선한 의지의 삶을 통해 꾸준히 가꿔나가야 할 ‘우리의 영역’에서는 거꾸로 하늘이나 이웃에게 책임 전가를 하거나 운명론 타령을 일삼으며, ‘타락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그의 영역’ 대신 거꾸로 관상학이나 점괘 등의 통계나 미신을 믿고,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우리의 영역’에 관한 말씀을 실천하는 데는 무관심한 채 거꾸로 이기적인 복이나 소원성취만을 갈구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하긴 저부터도 그랬습니다.
젊은 날 보행장애인이라는 운명의 덫에 걸리자, 나보다 더 악하고 못된 사람들도 다 건강하고 만사가 잘나간다 싶은데 나는 남보다 무슨 죄가 그리도 많아서 이런 것이냐고, 하늘을 향해 “Why? Why me?”를 원망하듯 외치며 나름대로 고뇌도 많이 했습니다. ‘개똥철학’도 많이 앓았습니다. 그러면서 ‘죽은 하나님’ 내지 ‘세상에 무관심한 하나님’을 탓하며 실존주의적 허무나 부조리나 무의미 같은 질병을 크게 앓기도 했고, 그 결과로 저 역시 음독자살까지도 시도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절망’이라는 어리석은 ‘나의 선택’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인간의 선택조차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도 사람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절망이 오히려 하나님의 시작 곧 구원의 시작이 된 사람은 그래도 다행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자 은총이자 긍휼에 의한 구원임을 역설적으로 확인 및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의 창시자이자 위대한 신학자였던 죤 칼뱅 선생은 그런 ‘구원에의 감탄사’이자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대한 근원적 이해를 ‘예정론(豫定論)’이라는 학설로 풀었습니다. 보다 높은 차원의 영성에 열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인이 되고 선한 일에 힘쓰는 노력 그 자체조차도 ‘하나님이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섭리와 역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豫定)' 자들로
또한 그 아들(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로마서8:29-30)
저 말씀에 바탕을 둔 ‘구원의 예정론’이 보다 깊고 높은 차원에서
‘팔자의 운명론’을 이기고 극복하는 영성 비밀입니다만,
그러나 ‘예정론’이 신학적 학문이나 도그마가 되어버리면 위험하니까,
조심스럽게 접근 내지 이해해야 할 그것입니다.
그럴 것이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자 구원받아야 할 자녀들인데,
일부 예정된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불공평이자 모순이 아니냐?
성경에는 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만인구원론’도 있지 않느냐?”,
그런 반명제가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만인구원론(萬人救援論)’ 역시
분명히 성경에 근거를 둔 또 다른 학설입니다.
따라서 저는 ‘전체(全體)이신 하나님’을 특정 인간이나 교파의
신학을 위한 신학이나 학설을 위한 학설에 가둬두는 것 역시 어리석음이자
교만이자 독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보다 중요한 가치이자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의 삶에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각설하고,
인간 우리가 고뇌하고 절망한다고 해서 불행한 사주 내지 팔자나 운명이
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골짜기가 깊을수록 산은 높습니다.
그러나 방황(彷徨)은 길고 깊을수록 세월만 높습니다.
인생 우리가 ‘운명론’ 내지 ‘팔자론’이라는 인간적 이해나 자기의 함정으로부터
서둘러 길 내지 방향을 바꿔야 할 ‘회개(悔改)’의 필연성이 강조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었지요.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저는 저 명언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운명론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선(善)을 찾아낸다.-
하나님에 의해 자유의지가 부여된 인간에게,
그래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운명은 우연이 아니고 선택입니다.
신앙과 불신앙, 순종과 불순종, 축복과 저주 등에 대한
선택은 ‘우리의 영역’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금기의 선악과’를 따먹어버리는 ‘타락한’ 선택을 함으로써 후손인 우리들의 인생까지 대대로 죄와 저주와 고난과 죽음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것이 대의적인 그리고 구속사적인 인간 우리의 ‘불행한 운명’입니다.
세상에서 한 시절 남보다 좀 더 잘 먹고 잘 누리고 잘 사는 삶 그것이 결코 ‘죽음에 이르는 운명’ 앞에서 진실로 행복한 것도 참 축복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운명’이라는 삶이 그러신 것처럼 ‘33년’을 살다 죽더라도, 죽음에 이르는 운명에서 거듭나서 가치 있게 사는 운명 곧 부활의 운명으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의(義)’라는 그 영원한 가치 그 영원한 생명 자체가 참 행복이고 참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가 대속자(代贖者)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
곧 ‘새로운 피조물’로 운명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운명이 변화된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good)을 이룬다”(로마서8:28)고
성경은 또한 분명하게 증언 및 약속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이나 환난이나
죽음조차도 ‘영원의 차원(eternity)’에서, ‘최고 의지의 차원’에서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긴 안목으로 섭리 및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주나 팔자, 관상, 점괘 등의 ‘운명론’이나 ‘운명철학’에 미혹당하지 말아야할,
금세와 내세에 걸친 영원한 차원의 확신과 필연이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복이 있는 ‘새로운 피조물’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운명’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필연적으로 그렇게 변화되어야만합니다. 회개 곧 ‘방향을 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우리의 영역’이자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ion)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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