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참 '인성(人性)교육'을 위하여

이형선 2014. 2. 17. 11:14

 

근년에 들어,

한국의 높은 교육 수준이나 교육열에 대한 장단점이

외국 언론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곤 하더군요.

그것이 긍정적 평가이든 부정적 평가이든,

이렇다 할 부존자원도 없는 가난한 나라가

근면한 인력 내지 인재라는 자산 하나로,

반백년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내고

나아가 이른바 ‘경제강국’으로 부상한 데 대한

관심이자 주목이라고 사료됩니다.

 

 

물론 그 외신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거개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우리 민족 심성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교육을 중시하는 유교적 전통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엄청난 비용이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들의 치열하고 경쟁적인

교육열이 그 요인으로 집약되곤 하니까요.

 

 

한국인들의 교육열이나 고학력 수준이

‘핀란드에 이어 세계 2위’라는 보도도 있더군요.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공동체적 가치인 국가경쟁력이나 청렴도(淸廉度)에서

핀란드는 역시 세계 1위인데,

우리 한국은 까마득한 하위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수백년의 역사를 통해 서서히 이루어진

서구의 선진화에의 경험이나 연륜에 비해 우리나라는

그 역사나 경험이 일천(日淺)한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그래서 또한 우리의 단점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에도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서 배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스웨덴 교육전문가 안나 마리아 마틴손은 이렇게 평가했더군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너무 교과서와 시험 위주이다.

 (그래서 억눌려 있는) 학생들이 그룹 활동을 통해

 서로 교류하거나 자율로 할 수 있는 여지가 극히 적다.-

 

 

또한 ‘인성교육 문제’를 주제로 한 모 ‘대학토론회’에서,

한 대학생이 보다 실감 있게 이렇게 말했더군요.

 

-협동을 무시하고 남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경쟁만을 가르치는 이 사회에서 인성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1등만 알아주는 상황에서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아닌,

 점점 혼자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인식도

 학생들의 인성을 약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남들과 한사코 비교하며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경쟁해서 이겨야만 하는,

점수나 일등만을 알아주는 ‘시험 위주’의 사회, 자율적인 공동체성 곧 공존과 상생의 위한 인성과 사회성은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이자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말을 바꾸자면, 가분수처럼 기형적으로 머리만 키우는 교육이지 가슴이나 몸집을 키우는 교육은 못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다수가 된 그래서 사회문제가 된

이른바 ‘고학력자 실업난’도 ‘국내외산 박사들의 취업난’도,

다 가슴이나 섬김의 삶을 키우지는 못하고 남보다 윗자리에서 대접 받으며 군림하는 지식과 머리만을 키운 교육의 결과이자 그 그늘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것이 중소기업이나 이른바 ‘4D 업종’은 여전히 인력 부족난의 시대라고 하니까요.

 

 

‘미시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걸출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이 이런 말을 했지요.

 

-인류의 길고 긴 역사에서,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종교와 경제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후학들이나 인생 후배들에게

이렇게 살자는 제언이자 명언을 남겼습니다.

 

-머리는 냉철하게 그러나 가슴은 뜨겁게-

 

 

그러니까 자본이나 경제학을 공부해도 그리고 그 분야에서 종사해도 ‘경제적 동물’이 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아는 ‘종교적 인간’이 되라는 의미이자, 재물이나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격이 되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유식하고 냉철한 지식인의 ‘머리’를 가지되,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뜨거운 ‘가슴’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것은 비단 이웃을 위한 문제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그 ‘냉철한 머리’를 살리는 길도 실인즉 자기의 ‘뜨거운 가슴’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존과 상생의 ‘뜨거운 가슴’은 전혀 키우지 못한 채, 냉철하고 냉정한 머리만 경쟁적 내지 죽기 살기로 키우는 교육이나 그런 사회는 그 열매로 인해서 되레 피차 불행해집니다.

그것은 비단 이웃이나 사회와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뜨거운 가슴’을 키우지 못하고 ‘냉철한 머리’만 키우면, 그 ‘냉철한 머리’가 부메랑이 되어 훗날 그렇게 키운 그 부모나 그 선생이나 그 가족을 되레 ‘냉철하게’ 해체 내지 난도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좋으나 싫으나 ‘자본주의’라는 ‘경제시대’를 살아야만 하는 우리로써,

‘뜨거운 가슴’을 위한 교육이나 그 모범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 되어야만 합니다. 자기 부모나 자기 자녀, 자기 가족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이기적인 경제용 인간들이나 회사 내지 기업용 인간들을 제품처럼 생산해내기보다는,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그리스도의 가슴’을 가진 사람으로 키워낼 수 있는 참 인성(人性)교육이 절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새삼스럽지만, 인성 곧 인간성(人間性)이란 뭡니까?

'사람다운 사람의 성질과 됨됨이(性品)' 아닙니까.

그럼 그런 참 인성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이자 지식의 보고(寶庫)인,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의 체험적 인생 고백이자

‘잠언’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호와(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1:7)

 

 

나아가 솔로몬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my ways)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언8:32-35)

 

 

우리가 저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기서 말하는 ‘내 도(道)’나 ‘지혜’는 인간 솔로몬이나

특정인간의 ‘내 도’나 ‘지혜’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잠언8:22-23)

 

 

바로 그 ‘하나님의 도’이자 ‘하나님의 지혜’ 그 자체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된 성경 말씀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도 요한은 같은 어법으로 신약 ‘요한복음’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the Word)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1:1-3)

 

 

저기서 ‘태초의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의 신적(神的) 정체성과 선재성(先在性)을 고도의 조직신학적 표현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줄기차게 예언이 된 그대로 마침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incarnation)’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언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구원자, 구세주’를 의미하는 구약 히브리어 ‘메시아’와 신약 헬라어 ‘그리스도’는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저 구약성경 및 잠언에 계시된 ‘하나님의 도’이자 ‘하나님의 지혜’이자 '하나님의 예언이자 언약'이 육신을 입고 신약의 세상에 오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자 ‘생명의 말씀(logos)’ 자체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인격'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그런 자기 정체성을

이렇게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한복음8:58)

 

 

난해한 말씀입니다.

이천 년 전의 실존인물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는 존재라는 것. 신학적으로 일컫는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 및 인간성을 진실로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이자 지식의 ‘말씀’으로 여일하게 세상에 현존하는 실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저 말씀에서 우리가 또한 주목해야 할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내가 있었느니라”가 아니라는 그것입니다.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입니다. “내가 있느니라” 곧 “에고 에이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현존(現存)하는 대속자이자 구원자이자 참 '말씀' 자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참 인성교육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자 길이자 지혜이자 말씀인,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 현존(現存)을 알고 믿을 때,

비로소 구원과 ‘선하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본래성의 회복이 가능한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뿌리부터 타락한 그래서 비본래적인 죄악성을 가진 인간이

상대적으로 좀 더 나은 현자(賢者)의 고상한 철학이나

윤리도덕이나 율법이나 실정법 차원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문제는 이미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처럼,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자기나 자기 가족의 복된 사회성을 위해서라도,

‘경제’보다 먼저 ‘종교’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하는” 노력과 열심이 강조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경제’의 세계의 결국은 피차에게 약육강식이나

승자독식의 동물의 세계이자 짐승의 나라일 뿐이니까요.

 

 

‘선한 목자’에게 진실로 배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됩니다.

고통 받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나 보다 ‘작은 이웃들’을 자기 몸처럼

겸손하게 섬기고 살리는, 참 인성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과 공존과 상생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면,

이웃이나 작은 자들은 결코 남(他人)이 아닙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다 같이 '한 몸'인 자기의 지체가 됩니다. 자기 가족이나 자기 지체 앞에서 자기의 세상 재물이나 지식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 등을 자랑하며 과시하며 교만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참으로 유치한 사람이자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혈연 앞에서는 잘난 자나 못난 자의 비교우위가 없습니다. 많이 배운 자나 못 배운 자의 비교우위도 없습니다. 부자나 빈자의 비교우위도 없습니다.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보혈)' 앞에서는 비교우위라는 상대적 인간 차별이나 인간 소외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참 인성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참 인성은 그래서 한 마디로 ‘사랑(agapee)’입니다.

그래서 저는 외람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의

‘거룩한 사랑의 시편’을 이렇게 표현해보고도 싶습니다.

 

 

-‘참 인성(人性)’은 오래 참고,

 ‘참 인성’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참 인성’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13:4-7)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