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다모클레스의 검'과 '성령의 검(劒)'

이형선 2014. 3. 3. 10:49

 

주지하다시피,

한미연합사령부가 주관하는

이른바 ‘중요한 결의’라는 ‘키 리졸브(Key Resolve)’

훈련이 여느 해처럼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을 ‘북침전쟁 연습’, ‘가상 침략훈련’이라고 강한 톤으로 항의 및 비난해 오던 북한군의 정서불안은 금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달 27일, 북한군이 ‘단거리 탄도미사일 4발’을 동쪽 공해상으로 발사했다고 하니까요. 물론 키 리졸브 훈련에 대한 항의성 시위이자 우회적 비난의 표출이 되겠지요.

 

 

‘키 리졸브(Key Resolve)’는 또한 ‘해결의 열쇠’라는 의미도 가지는데, 아무쪼록 저 훈련이 패권이나 전쟁을 위한 전쟁의 열쇠가 아니고, 진정으로 동북아 및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해결의 열쇠이자 북한의 핵무기에 대한 평화적 해결의 열쇠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신의 심판’이자 ‘필요악’일까요?

다만 교만한 인간들이 자행하는 ‘재앙’일 뿐일까요?

미국 35대 대통령이었던

고 존 F. 케네디가 이런 말을 했었지요.

 

-전쟁의 준비를 해놓아야만 평화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동서양 인류 역사의 ‘안타까운 사실’이자 현실입니다.

힘이 없는 정의나 평화의 외침은 현실적으로 공허합니다.

우리의 현실적 고민이자 물리적 숙제는 거기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대통령 재임 중에 행한 한 연설에서

‘핵무기’를 ‘인류에게 있어서 다모클레스의 검(劒)’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다모클레스는

시칠리아 섬의 도시국가 시라쿠사의 왕 디오시우스의 신하입니다.

그는 왕의 통치 권력과 영광을 부러워하며,

왕의 위엄을 찬양하는 등 왕의 비위를 맞추기에 열심이었던 인물입니다.

어느 날, 그런 다모클레스에게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왕의 자리에

 하루 동안만 직접 앉아있어 보도록 하시오.”

 

 

소원풀이를 하게 된 다모클레스는 왕의 선처에 감격하며 왕좌에 오릅니다.

천하가 눈 아래로 보이고, 눈 앞에 풍성하게 배설된 산해진미.

그것까지는 좋은데, 머리 위 천정을 쳐다본 순간 그는 소름이 쫙 끼칩니다.

머리카락 한 올에 매달려 있는 예리한 칼!

자기 머리 위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

다모클레의 감격은 온통 공포 일색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권좌가 되레 좌불안석이 됩니다.

 

 

실인즉 그렇습니다.

칼이나 폭력이나 핵무기로 얻은 권좌는 또 다른 칼이나 폭력이나 핵무기에게 언제 당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언제 자기 머리에 떨어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좌불안석입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졌다고 해서 교만을 부리거나 딴청을 부리는 어리석은 자기 미혹 내지 자기 비극에 빠져서는 안 될 필연이 거기 있습니다.

물론 저 케네디의 언급처럼 ‘핵무기’는 여전히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다모클레스의 검’이지만, 임기가 법적으로 보장된 선출직인 케네디의 대통령 권좌조차도 역시 ‘다모클레스의 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텍사스주 댈러스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도중에 암살범 오스왈드가 쏜 총탄을 맞고 비운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바로 50여년 전의 일입니다.

북한의 권좌라고 해서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열강국들은

다투어 재물이나 자본이나 핵무기 같은

물리력을 키우며 ‘무장’하기에 바쁩니다.

‘주먹들이 날뛰는 험악한 세상’을 살려면 무장은 해야 합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전신무장(全身武裝)’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그 무장은 재물이나 총칼이나 핵주먹 같은 물리적인 무장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화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에베소서6:)

 

허리띠’나 ‘방패’나 ‘투구’ 등은 방어적인 무장이지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공격적인 무장입니다.

그러니까 ‘악의 영(靈)’과 거기 사로잡힌 ‘악한 자들’을 대적해서 능히 이기는 능력의 무기가 바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내지 처참한 순교적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능히 이기는 담대한 능력이라는 것. 헌신의 능력이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능력입니다. 가장 강한 자는 헌신이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합니다. 인간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강합니다. 또한 강해야만 합니다. ‘칼’의 생명보다 길고 강한 것이 ‘펜’이고, 펜의 생명보다 길고 강한 것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무력한 분도 무능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능력이나 무기를 능히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고', 바다 위를 걷는 등의 기적을 행하고, 죽은 자들조차 살리는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칼’과 ‘말씀’의 전쟁을 성경적 언어나 문법으로 표현한다면,

사탄이나 마귀, 귀신들이라고 부르는 ‘악한 영(惡靈)’과 ‘하나님의 영(聖靈)’의 전쟁이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공중 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과의 ‘영적(靈的)전쟁무대’인 것입니다.

예컨대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히틀러 같은 사람은 먼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그래서 악한 하수인이 되어 잔혹한 전쟁 및 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순교한 신학자 본회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친 사람이 차량의 운전대를 잡고 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미친 사람’이나 그 차량이나 그런 집단을 방치하는 것은 정의도 공의도 질서도 사랑도 아닙니다. 그것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정의와 불의 혹은 적군과 아군이라는 대적이 맞서서 총칼이나 핵무기 등의 전쟁을 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너와 나’라는 우리 개개인의 ‘전쟁’도 역시 ‘주먹’보다 ‘감정’이 먼저입니다.

먼저 악한 심령(心靈) 내지 감정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악한 감정의 하수인이 되어

상대방과 욕질 및 주먹질싸움을 하게 되고 나아가 칼부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 인간들에게 피차 죄악의 역사는 있고 그래서 때론 가해자적이고 때론 피해자적인 고통과 살육의 역사는 있었고 또 있겠지만,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늘 하나님이자 말씀이십니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국 로마도 망하고, 정복자 나폴레옹도 망하고, 전쟁광이던 히틀러도 다 망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과 그 교회는 오늘 현재도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요. 정의 내지 공의의 하나님이자 절대선(善)이신 하나님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 계신 것입니다.

 

 

한편으로 세례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백부장’이나 ‘천부장’ 등 당대의 ‘군인’이라는 직업이나 신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용론(無用論)이나 폐기론을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기의 인과론(因果論)’에 대해서는 이렇게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가지는(draw the sword)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26:52)

 

 

 

나아가 성경 ‘요한계시록’에,

‘사람 삼분의 일’을 학살하는 오늘의 ‘핵무기’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 말(馬)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며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요한계시록9:18-19)

 

 

이천 년 전의 신약시대를 살았던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확고한 체험적 신앙을 고수하다가 로마제국에 의해 유배당한 ‘밧모섬’에서, 하나님이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계시 및 환상을 그대로 증언한 내용이 곧 ‘요한계시록’입니다. 이천 년 전의 옛날사람에게 오늘의 핵무기나 우주선을 보여준다면 ‘불이나 연기나 유황을 내뿜는 말(馬)들’처럼 묘사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이 대단한 것 같아도,

실상인즉 인류 역사는 성경에 이미 예언 내지 계시된 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우리 개개인의 운명도, 지구촌이라는 인류의 운명도 다 ‘종말론’을 향해 진행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한 순간 내지 한 철 내지 한 시대의 생명인 ‘검(sword)’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지닌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word)’을 먼저 구해야 할 지혜의 필연성이 거기 있습니다. ‘핵무기’보다는 원수조차도 포용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오래 참으며 대화와 협력을 모색해야 할 필연성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은 대박’이겠지만,

그 대박은 사람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전쟁도 통일도 평화도 다 신앙위인 다윗의 체험적인 고백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중심으로 인간의 세속사(世俗史)를 볼 수 있는 우리의 영안(靈眼)이 열리면 열릴수록 그만큼 우리는 피차 더 겸손해 질 수 있고 그래서 우리의 남북간의 통일은 물론이고, 지역간 세대간 빈부간 계층간 이웃간의 모든 통일도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의해 보다 앞당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단비를 기다리면서도, 하늘을 볼줄 모르는 사람들은 차라리 어리석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1:3)

 

 

끝으로,

중국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푸른 나무를 간직하라.

 그러면 노래하는 새들이 날아들 것이다.-

 

그것을 이렇게 풀어봅시다.

-당신의 마음속에 날카로운 칼을 간직하라.

 그러면 날카로운 칼들이 날아들 것이다.-

 

 

남북 우리 민족 모두의

공존과 상생을 위해서도,

우리 개개인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도,

‘칼’이 아닌 ‘푸른’ 용서와 사랑과 생명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필연성과 절대성이

강조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