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아빠와 어린공주의 은하수(銀河水)

이형선 2014. 3. 17. 11:38

 

마침내 산 앞에 설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래선지 여전히 마파람이 불고 있었다.

아빠와 어린공주가 등산로 초입에 들어섰을 때,

땅거미마저 지고 있었다.

그렇게 산은 통째로 큰 어둠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것은 빗나간 뿌리 같은 무서움의 세계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죄다 서둘러 하산을 하고 있었다.

 

 

아빠의 가슴에 묻힌 상처가 또 도진 것일까.

아빠는 작년 이맘 때 있었던 그 상처가 도지면

홀로 승용차를 몰고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

오늘은 달포 전에 아빠와 손도장까지 찍으면서 했던 약속이 있어서 따라나서긴 했지만

갑작스런 산행이 불만이었던 어린공주는 이내 그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아빠, 다른 사람들은 죄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왜 우리는 밤에 되레 산으로 올라가는 거야?”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지. 사람은 다 자기 몫의 길이 있단다. 너는 은하수(銀河水)가 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아빠도 지금 산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 아냐. 너와 함께 하늘 은하의 세계가 보고 싶어서 가는 길이지.”

 “그렇다고 밤에 산에 갈 필요는 없잖아. 아빤 무섭지도 않아?”

아빠가 씩 웃었다. 자신 있는 웃음이었다.

 “아빤 무섭지 않아.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힘이 있어야만 힘이 되는 것은 아니란다. 아빠에게 너는 힘이야. 힘이 솟아나게 하는 샘이라고.”

어린공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그런 어린공주의 기분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아빠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물론 네 말이 맞아. 밤에 산에 오른다는 것은 때론 무섭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일이지. 우리가 가야하는 인생이라는 길이 때론 무섭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바른 길을 가면 꼭 무섭고 위험한 것만은 아니란다.”

 “바른 길?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바른 길이야?”

 “그렇지. 이 산은 이 등산로가 잘 놓여 있단다.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길은 동서남북으로 많이 있다고 쉽게 말들을 하지만 샛길은 정말 위험하단다. 늘 바른 길을 갈 수 있어야 해. 길은 곧 생명이기도 하니까.”

 “아빠는 길을 잘 아는가 봐?”

 “글쎄…, 너보다는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살아온 경험보다 더 진솔한 앎이나 지혜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아빠와 어린공주는 산길을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달포 전 어느 날 밤.

아빠의 가슴에 묻힌 상처는 또한 어린공주의 가슴에 묻힌 상처이기도 했다. 몹쓸 병을 앓다가 작년에 하늘나라로 돌아간 한 살 터울이었던 남동생 현우의 모습이 문득 보고 싶어진 어린공주는 홀로 베란다 창가에 서서 밤하늘의 별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 밤하늘에는 맑은 은하수가 흐른다는데 어디 있는 거야? 어디에도 없잖아?”

과연 도시의 밤하늘에는 은하(銀河)도 거기 흐른다는 은하수도 없었다. 네온이나 아크릴의 각양 불빛들만 땅의 원색처럼 때론 혼돈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그때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은하가 없는 것은 아냐. 하늘에 은하의 세계는 있단다. 다만 매연이나 황사 등의 공해로 탁해진 도시의 하늘이 그것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 사람도 눈이 어두워지면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온전히 볼 수 없게 되잖아.”

 “그럼 우리는 이제 은하수를 볼 수 없는 거야?”

아빠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하늘의 은하는 오늘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란다. 기회가 생기면, 아빠랑 같이 가서 직접 보도록 하자꾸나. 그러나 맑은 은하의 세계를 보기 위해선 네가 때론 힘들만큼 어려울 수도 있는 길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것은 좀 어려운 말로, 자기(自己)라는 집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어린공주는 하늘 은하의 세계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아빠의 말이 그냥 좋았다. 그래서 그 약속 꼭 지킬 것을 당부하며 먼저 손을 내밀어 아빠와 손도장까지 세게 찍었었다.

 

 

산 중턱에 오르자 어린공주는 다리가 절로 아파왔다.

아빠의 손을 잡고 오른다지만 그래도 힘이 들었다. 등에 야영도구 등 제법 무거운 짐을 짊어진 때문이기도 했다. 아빠는 하늘 은하의 세계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몫의 짐은 자기가 기쁘게 짊어지고 갈 수 있어야 한다면서, 어린공주에게도 자기 몫의 짐을 십자가(十字架) 모양으로 꾸려서 스스로 짊어지도록 했던 것이다. 아빠의 등에도 역시 십자가 모양의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짐이 메어 있었기에 어린공주가 업혀갈 수 있는 상황은 이미 아니었다.

어린공주는 아빠가 들으란 듯 연방 가쁜 숨을 더욱 거칠게 내쉬었다.

그러나 아빠는 모른 척하고 계속 산길을 오르기만 했다. 어린공주는 그런 아빠가 너무 야속하다 싶었다. 오늘따라 너무 냉정하고 무심한 아빠다 싶었다. 그래서 그냥 주저 앉아버릴까도 싶었다. 은하수 보는 것을 그만 포기하고, 엉엉 울면서 집으로 그냥 돌아가버리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었다.

한 손에 랜턴을 켜든 아빠는 여전히 앞 산길을 주의 깊게 살피며 서둘러 걸어오르기만 했다. 그것이 다른 한 손을 잡고 뒤따라오는 어린공주를 위한 아빠로서의 최선의 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어린공주가 입을 열어 짜증어린 하소연을 토했다.

 “아빠, 나 정말 숨이 가빠 죽을 것 같아! 너무 힘들어!”

비로소 아빠가 이렇게 받았다.

 “그럼 우리 좀 쉬었다 갈까?”

 “제발 그래, 아빠.”

아빠와 어린공주는 둔덕진 곳을 찾아 나란히 앉았다. 아빠는 어린공주의 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던 것일까. 거기서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무심하다 싶은 아빠를 많이 원망했겠구나. 네가 너무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움도 나약함도 아니란다. 우리가 때론 무심하다 싶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드리는 기도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것을 아프다고, 약한 것을 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다.

그러면서 아빠는 아빠보다 더 약한 너를 위해 이렇게 쉬어가고, 너도 너보다 더 약한 누군가를 배려하며 쉬어가는 마음이나 함께 가는 마음을 배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몫이겠지. 그렇지요? 공주님?”

어린공주는 고깝다 싶은 마음이 금세 변했다.

그런 아빠의 마음이 새롭고 크게 돋보였다. 짜증을 낸 게 미안한 때문이었을까. 많이 지쳐 있기도 했던 어린공주는 그래서 대답 대신 칭찬하듯 응원하듯 아빠의 손을 마구 두들겨주었다.

 

 

이윽고 당도한 야영지.

깊은 밤 높은 산에서 보는 밤하늘의 별밭은

같은 별밭이었지만 도시에서 보던 별밭과는 전혀 달랐다.

손에 잡힐 듯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들.

텐트 안에서 한동안 축 늘어져 있던 어린공주가 촛불을 켜들고 나갔을 때,

아빠는 뒷모습을 보인 채 새벽별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어린공주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까치발로 다가갔다.

그러던 어린공주는 아빠가 하늘을 향해 나직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를 문득 들을 수 있었다.

 “현우야…. 현우야….”

그것은 차라리 신음소리 같았다.

아빠는 현우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던 것일까.

돌연 발걸음이 굳어진 어린공주는 못들은 척 침묵하고 있다가 짐짓 기척을 내며 큰소리로 말했다.

 “아빠-, 은하수 찾았어?”

 “그래, 찾았다. 정말 소중한 것은 늘 고독한 자리에서 찾아지는 것인가 보다. 어서 이쪽으로 오렴. 널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있는 거야?”

 “저기 보이잖아.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강처럼 하얀 별무리의 흐름.”

 “아하, 저게 바로 은하수로구나!”

 

 

돌연 아빠가 말머리를 돌렸다.

 “외진 산중이라 무섭니?”

어린공주는 크게 도리질을 했다.

 “아냐. 아빠가 늘 내 곁에 있잖아. 아빠가 나와 함께 있으니까 나도 무섭지 않아!”

아빠가 씩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왜 촛불은 켜들고 나왔니?”

 “은하수를 찾는데 도움이 될까봐서. 산중이라 너무 어둡잖아.”

 “그렇다면 네가 켤 수 있는 그 촛불마저 끄려무나. 그럴 때 우리는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별을 더 가깝게 볼 수 있단다. 별을 진정한 별로 보려는 사람은 자기가 켤 수 있는 크고 작은 모든 불을 스스로 꺼야만 한단다. 삶도 죽음까지도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하게 하나님께 맡길 때, 비로소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공주는 단숨에 훅 촛불을 꺼버렸다.

주변은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아빠가 말을 이었다.

 “캄캄한 밤 캄캄한 어둠은 때론 고통스러운 절망일 수도 있지만, 그런 밤조차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의 하늘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이 저렇듯 선명하게 떠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거라. 그리고 별들을 볼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에 열리게 되면, 거기 늘 생명수 같은 은하수가 또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네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어라.

정말 아름다운 밤하늘이구나. 저렇듯 정말 아름다운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결코 화려한 것이 아니란다.”

그리고 아빠와 어린공주는 한동안 그런 밤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은하수의 물을 쪽박 같은 반달로 떠서 한 모금 두 모금 마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의 은하수는 그렇게 아빠와 어린공주의 마음을 타고 내려와 생명수가 되고 있었다.

 

어린공주는 하얗게 반짝이는 은하의 세계가 하늘의 천사들이 모여있는

군대이자 본부인지도 모른다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 어린공주는 별나라로 돌아간 ‘어린왕자’를 생각했다.

어린공주에게 그것은 늘 하늘나라로 돌아간 남동생 현우에의 기억과 오버랩 되는 것을 의미했다.

아빠의 가슴에 묻힌 현우가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어린공주는 그래서 현우의 이름을 들먹이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아빠, 어린왕자가 그렇게 말했잖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젠 나도 알았어. 그리고 보았어. 캄캄한 밤이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하늘에 은하수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빠는 그런 어린공주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막의 샘이나 하늘의 은하수 그 자체가 아니란다.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세계,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다.”

 “마음의 세계? 그건 또 뭔 데?”

아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일테면 네가 오늘 본 은하수가 너의 은하수로 끝나버리면 그것은 결코 마음의 세계가 아니란다. 상처 입은 사람의 그 상처가 자기의 상처로 끝나버리면 그것도 마음의 세계는 아니지.

십자가에서 상처 입은 예수님이 이웃이자 죄인인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자기의 상처로 이웃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의 세계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좀 어려운 말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그것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의 세계이자 ‘그리스도의 마음’의 세계라는 말이지.

 그렇듯 마음의 세계도 정말 아름다운 것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지 결코 화려한 것이 아니란다.”

 

 

하늘 은하의 별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예수님의 큰 눈동자도 거기 있었다.

현우의 작은 눈동자도 거기 있었다.

아빠와 어린공주는 분명하게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맑은 빛의 세계이자 마음의 세계였다.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