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울리는 사이렌(siren)은
위급함을 알리는 정보로 주로 사용이 됩니다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원조 사이렌(Siren)은
매혹적인 노래를 불러 사람의 마음을 호리고
빼앗아 마침내 잡아먹어버리는,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몸집은 새인 마녀입니다.
오디세이는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했지만, 그가 탄 배는
그리스로 귀환하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본대에서 떨어져 아예 항로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이 광야에서 방랑하듯, 바다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긴 표류의 여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천신만고 끝에 오디세이가 지중해 연안에
이르렀을 때,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녀 사이렌 세 자매의 소굴이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세 자매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정신이 홀려 스스로 암초를 향해 배를 몰아가게 되고 그래서 파선되면 사람들은 역시 하나 같이 마녀 사이렌의 밥이 되곤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우리 인간들의 한계이자 불행입니다. 잔악했던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그 대학살의 시대를 유태인이었던 아내를 위해 아내와 함께 피해자의 삶을 살다간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한계상황(限界狀況)’입니다.
다행히도 마녀 사이렌의 술책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오디세이는 그의 소굴에 이르자 휘하 선원들의 귀를 꿀벌이 집짓는 데 쓰는 밀랍으로 아주 밀봉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하는 지휘관인 자신의 귀조차 밀봉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부하들에게 자기의 몸을 배의 중앙돛대에 단단히 묶도록 지시합니다.
“내가 아무리 몸부림치거나 아우성쳐도
절대 나를 풀어놓아선 안 된다.
너희들은 힘껏 노를 젓기만 해라.”
시험 혹은 위기 혹은 한계상황을 극복하고자하는 헬레니즘의 지혜이자 오디세이의 지혜는 그렇듯 구속(拘束)되는 것이고, 차라리 옹색한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명장 오디세이도 역시 인간 우리처럼 마녀의 술책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몸부림치며 노래가 들려오는 쪽으로 배를 몰고 가라고 미친 듯 고함 및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귀를 밀봉한 선원들은 노래도 고함도 아예 듣지를 못합니다. 갈 길을 향해 힘껏 노를 젓기만 합니다. 그렇게 오디세이 일행은 위기이자 사경을 극적으로 모면합니다. 상대적으로 분통이 터진 마녀 사이렌은 그 분을 이기지 못해 자살해버리고 맙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매혹적인 저 ‘마녀 사이렌의 노랫소리’는
여전히 아름다고 달콤하게 들려옵니다.
주색 타령을 하는 유흥가에서도 들려오고,
‘문화’라는 화려하고 고상한 옷을 입고
TV나 영화나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등의 SNS를 통해서도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우리가 저 오디세이 일행처럼 아예 귀를 밀봉하거나 밧줄로 몸을 묶어둔 채 살 수만도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밖에 없는 다양한 형태의 위기 내지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참 구원의 길이나 지혜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그렇게 방어적인 자세만을 취하며 외진 산으로 바다로 도망만 다니며 살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외진 산과 바다를 포함한 모든 세상이나 ‘자기(自己)’라는 인간은 어차피 성경의 정의 그대로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Satan)’의 세력 아래 있으니까요.
하긴 그래서 오늘도 ‘마녀 사이렌’의 밥이나
‘마귀(Satan)’의 밥으로 먹히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육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음란물’일수록 관심도 인기도 높습니다. 인간의 선(善)을 위한 말씀보다는, 인간의 성(性)을 위한 불륜이나 일탈일수록 관심도 인기도 높습니다. 각종 문화도 ‘고급문화’보다는 그런 유형의 ‘대중문화’가 더 잘 팔립니다.
하긴 인간의 영혼 내지 심령을 바르게 살려야하는 기독교 신앙풍토에서조차도 이웃과 공존하는 신앙인격을 위한 ‘성숙한 은혜’보다는, 무속신앙의 기원(祈願)이나 기복(祈福)이 그런 것처럼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소원성취나 만사형통을 위한 ‘값싼 은혜’가 더 잘 팔리는 형국이니까 새삼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아름답고 달콤한 그래서 매혹적인 저 모든 유혹 내지 미혹의 이면에는 ‘마녀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있고 그것이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귀에도 입에도 육체에도 우선은 달콤하고 매혹적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인도하는 길의 결국은 ‘암초’이고 나아가 파선이고 나아가 죽음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즘을 말하는 성경은, 사도 베드로는,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저 오디세이의 지혜
곧 헬레니즘이라는 인간 이성(理性)의 지혜이자 길보다
더 높고 크고 깊은, 초월자에의 지혜이자 길을 제시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이자 지혜의 체험적인 말씀을
이렇게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베드로전서5:8-10)
오디세이 일행처럼 귀를 밀봉하고,
몸을 밧줄로 돛대에 묶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입니다.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마녀 사이렌’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입니다.
‘우는 사자’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적하라는 것입니까?
영적 전투에서 최선의 대적은 ‘깨어 있는 영혼’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먼저 “근신하고 깨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근신(self-control)’의 의미가 뭡니까? 언행(言行)을 절제 내지 자제 하는 것 아닙니까.
문제는 인간 오디세이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언행이 자제되지 않으니까 몸을 밧줄로 묶어두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수도승들은 채찍으로 자기 몸을 피가 나도록 때리며 고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고행을 해야 할까요?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유형의 고행에 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물론 때로는 ‘금식(禁食)’이 필요하다는 절제의 말씀이나 검소한 삶을 살라는 말씀은 분명히 있습니다.
여하간 중요한 것은, 성경은 ‘근신하며 깨어 있는 삶’을 근원적으로 먹는 것 마시는 것의 문제나 육신에의 구속이나 가학 같은 자기 고행의 차원에서 구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저 베드로의 말씀 그대로 먼저 “고난을 당한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견고하게 하시는” 영적 능력의 실체에 대한 발견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성의 비밀 그 실체에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영적 존재’인 마귀는 인간보다 강합니다. 위대한 인간 그 누구보다 더 강합니다. 그 누구도 인간 자기의 노력이나 고행으로 마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참 영(靈)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함께 해주셔서 지켜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악령을 이길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 및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길 곧 '관계의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투에서 최선의 무기는 말씀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위한 소통이자 대화’인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안에서, 대속의 구원자 그리스도 안에서, “근신하고 깨어 있는 믿음을 통해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4:6-7)
나아가 저 사도 베드로의 말씀에서
또한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름답고 달콤하기는커녕 되레 ‘고난’이라는 그것입니다. 하나님 및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값없이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고, 복을 받는다는 그것이 ‘복음’ 아닙니까?
사실입니다. 그것도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땅의 달콤한 ‘젖과 꿀’만 찾는 그런 구약적(舊約的) 내지 유아적 ‘값싼 은혜’에만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결국은 망국(亡國)의 한으로 끝난, 세상 여느 나라 백성들의 욕구나 가치와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계상황’이자 불행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유념 및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성숙한 은혜’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상에 와야만 했던 이유이자 필연입니다. 내일 및 내세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헌신 내지 희생이라는 응분의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잠깐의(a little while) 고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 고난은 로마제국 네로 황제에 의해 자행된 대박해이자 대환난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저 고난은 우리의 인간적 안목에서 보면 결코 ‘잠깐의 고난’이 아닙니다. ‘길고 큰 고난’입니다. 치명적인 박해이자 차라리 운명적이고 절망적인 환난입니다. 임박한 박해의 때를 예견했던 사도 베드로 자신부터도 그 고난 그 박해의 와중에서 형극의 고통을 당하며 처참하게 순교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런 형극의 고난을 왜 ‘잠깐의 고난’이라고 표현했을까요? 한 마디로 ‘잠깐의 죽음’보다 더 큰 것을 보았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순교의 고난이나 고통보다 더 큰 세계 내지 더 큰 영광을 확실하게 보았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로 말미암은 산 소망’(베드로전서1:2) 곧 ‘영원한 소망’을 확실하게 보았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죽은 소망’도 아니고, ‘죽을 소망’도 아니고, ‘산 소망(living hope)’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 곧 ‘성숙한 은혜’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영광도 ‘잠깐의 영광’이지만, 고난도 순교조차도 성숙한 신앙위인들에게는 ‘잠깐의 고난’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투어 전자를 선망하며 줄을 서지만,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좁은 문’은 되레 후자에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베드로전서1:24)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참 복의 길은 그래서 ‘잠깐인’ 세상을 이기는 ‘산 소망’이자 ‘영원한 영광’이자 생명이자 자유이자 평안 그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나와 함께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발견이자 믿음으로 집약이 됩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예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16:32-33)
이른바 잘 나가는 축복 받은 자리에서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에게조차 버림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절대 고독의 자리에서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 역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저 말씀의 비밀에 열린 것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이 정치적 메시야의 세상 권좌
그 좌우편을 차지하고자 서로 다투는 야심이나 축복 타령에 연연하고 있을 때, 그들이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액의 돈이나 대형 조직이나 축복 타령으로 ‘세상의 빛’이나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자나 권력자나 지식인이라고 해서 ‘빛’이나 ‘소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되레 ‘그들만의 리그’에 안주해서 차별화된 그것을 즐기는 교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상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를 태우지 않으면 곧 부인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녹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소금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신 것처럼 '비움과 낮춤' 곧 '케노시스(kenosis)'라는 겸허한 헌신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극히 쉬우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우리의 상식이자 고민이자 숙제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이 저 그리스도의 신앙인격을 닮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도 허락하시는 인생의 ‘가시’나 ‘환난’이라는 성숙한 은혜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 예수 그리스도나 저 사도 베드로가 당한
큰 박해나 순교의 때가 아니더라도,
인생의 각종 위기나 병고나 환난이나 죽음의 때 같은 '한계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인간 우리 역시 어차피 다 ‘혼자’ 있는 자가 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혼자 둘 때'나 '혼자 있는' 고독한 실존의 때가 있기 마련이고, 오기 마련입니다. 육체나 재물을 가진 인간 그 누구도 자기의 병고를 대신 앓아줄 수도 없고, 대신 죽어줄 수도 없습니다. '혼자'라는 것 그 자체가 근원적인 '한계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靈眼)이 열린 자에게 그것은 결코 절대 고독의 때도 아니고 자리도 아닙니다. 절대 능력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조차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견고하게’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저 비밀한 능력과 ‘산 소망’을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성숙한 은혜’를 받은 자는 그래서 참 복이 있는 자입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그런 복과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게 되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28:20)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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