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십자가의 길'보다 '더 좋고 더 유익한 것'?

이형선 2014. 4. 7. 11:05

 

-인간을 구원하는 데에

 고난 받는 것이 아닌,

 더 좋고 더 유익한 것이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틀림없이 말씀과 행동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복음9:23)-

 

 

                         〈토마스 아 캠피스〉

 

 

 

 

                * * *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우리를

어둠과 불행으로 인도하는 분이 아닙니다.

고생길이나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분도 아닙니다.

죄인인 우리를 ‘복이 있는 사람’으로 살리는 분입니다.

구원과 치유와 생명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입니다.

 

 

그런데도 유감스러운 것은,

그런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이 우리의 입맛에 맞는,

‘부귀영화의 길’이 전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저 길이 바로,

인간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것도 ‘성공할 때까지’ 사흘만 아니 삼년만

아니 십년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한시적으로 “나를 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그러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막연히 뭔가에 제한당하고

구속당하는 고역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본능적인

기피 내지 거부감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서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심령 내지 본능이

그만큼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반증이자 체크입니다.

위장이 크게 병들면 곧 타락하면 음식물은커녕 맹물조차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온전하게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달고 쓴 모든 ‘말씀’을 골고루 잘 먹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지극히 자연스럽게 ‘삶’이 되는 바로 그것입니다.

‘쓴 말씀’을 싫어하는 편식자는 결국 스스로 병들게 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daily)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렇습니다.

정작 자기를 부인해야 할 때는 ‘배부를 때’이고 ‘성공한 때’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연 ‘자기’를 지키고 살리는 복된 길은 되레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겸허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는 길입니다.

영성의 비밀이자 역설의 비밀입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결국 자기가 병들고 자기가 구속되고 자기가 불행해집니다.

인생 최고의 자유이자 최고의 행복이자 최고의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곧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계를 사는 인간 ‘자기의 자유’를 팔아서 영원한 ‘그리스도의 자유’를 산 사람은 참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풀의 꽃’ 내지 ‘안개’ 같은 세상의 생애를 사는 인간 ‘자기나라’와 그 뜻을 부인하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와 그 뜻을 구한 사람은 참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은

‘이기적인 동물’이기도 한 인간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고 해도,

여전히 본능적으로 싫을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십자가’라는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있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드렸으니까요.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기도드릴 수 있고,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내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인간 나를 진실로 살리는 절대가치는,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아버지의 뜻’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

 

 

고난이나 고통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저주받은 자’의 비참한 삶 자체를 의미하고 상징하는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박혀 대속(代贖)의 처형을 당해야 하는, 의로운 차라리 억울한 ‘죽음의 문제’조차도, 주님처럼 저렇게 ‘아버지의 뜻’에 맡길 수 있다면 우리가 맡기지 못할 그 어떤 고난이나 고통의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 우리의 그 어떤 ‘십자가’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절대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형극의 십자가를 능히 감당하고, 능히 이기고 마침내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능히 감당하고, 능히 이기고 마침내 부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세적으로도 내세적으로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라는 본능이 거부하는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 능력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자

참 영 곧 참 성령(聖靈)의 능력입니다.

참 기도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충만의

역사에서 그 전형이 이미 이렇게 입증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사도행전4:4:32)

 

 

나아가, ‘짊어진다’는 것은 기꺼이

감당한다는 것이고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돈이나 재물이나 지식이나 성공한 사회적 신분을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되레 그 모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으로 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저 모든 것을 그것이 필요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영성의 비밀에 열리면 ‘십자가’ 자체가 저 모든 것보다 되레 더 큰 능력이자 복이 있는 영원한 소유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행함이자 삶입니다.

무식해도 얼마든지 따를 수는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나 엄마의 뒤를 잘 따르는 그것처럼 말입니다. 실인즉 스스로 다 컸다는 ‘청소년’이나 ‘어른’보다는 유약한 ‘어린아이’가 되레 엄마와 아빠만을 오직 믿고 의지하며 그 뒤를 철저하게 잘 따릅니다.

성경이나 신학 댓 줄 배워서 스스로 유식해지면 스스로 ‘어른’이 되어버리고 그래서 남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만 할 뿐, 정작 자기를 가르치려는 '목자들'은 드물더군요.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되레 주인이 되고 '하나님'이 되어, 자기의 길을 가버리는 '목자'들도 많더군요. ‘티끌’인 인간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알면 뭐 얼마나 알겠습니까? ‘자기’라는 교만이나 독선(獨善)이나 도그마에 빠지는 그 자체가 차라리 서글픈 희극이자 비극이겠지요.

 

 

한편, 저 ‘부인하다(deny)’는 헬라어 ‘아팔네오마이’는

‘비난하다, 포기하다’는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땅에 임한 시대적 혼돈과 흑암과 공허는

‘성공한’ 목회자나 유식한 학자나 부자들이 없어서가 전혀 아닙니다.

스스로 ‘귀족’이 되어 누리고 있는 이기주의 내지 가족이기주의 내지 집단이기주의에 안주하고 있는 ‘직업종교인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한 사람’의 진실한 ‘의인’을 찾기는 차라리 어렵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는’ 한 사람의 진실한 ‘제자’를 찾기는 차라리 어렵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선 오늘도 대의멸사(大義滅私) 내지

대의멸친(大義滅親)의 길일 수 있는

‘하늘의 길’ 혹은 ‘동쪽의 길’을 앞서가고 계시는데,

우리는 “주여 주여”하면서 엉뚱한 ‘세상의 길’ 혹은

‘서쪽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존경할만한 신앙인격 내지 신앙위인이 귀한,

하향평준화 되어버린 ‘속물의 시대’

그것이 오늘의 신앙풍토의 비극이자 문제는 아닐까요?

그렇다고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사람다운 사람’을 찾기 위해

백주에 등불을 켜들고 거리로 나설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것에서조차도 방향을 돌려야지요.

그럴 것이 지금은 ‘속물’인 저 자신부터 먼저 진정한 ‘한 사람’의 제자

내지 의인되지 못한 것을 충심으로 회개 및 참회해야 할 때이니까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말씀’조차도 자본주의 ‘상품’이 되어버린

그래서 참 그리스도의 길이 아닌,

세속화의 길이 ‘부흥’하고 난무하는

우리의 시대를 불쌍히 여기소서.

친히 어서 오시옵소서!

‘십자가의 길’

본연의 자리로 어서 오시옵소서!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