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세 차례 우신, '그리스도의 눈물'의 의미

이형선 2014. 4. 14. 09:34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다 보면,

저는 이런 자문(自問)과 만나게 됩니다.

과연 그분은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흉악한 죄인들과 동일시된 자리,

‘골고다’ 저 낮은 곳에서 온갖 멸시와 조롱과

형극의 고통을 당하다가 끝내 죽으셨는가?

그럴 때마다 또한 자답(自答)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눈물’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이 이런 말을 남겼지요.

-눈물은 천만 단어의 말보다

 더 힘이 있는 웅변이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눈물은 가장 고상한 언어입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하나님마저도 울릴 수 있는

가장 숙연한 언어이자 가장 호소력이 있는 웅변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세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생애의 기록인 ‘4복음서’에는

두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히브리서’의 기록까지 포함하면 세 차례입니다.

물론 그 세 차례의 상황이나 대상이 각각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눈물’ 자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천만 단어의 말씀보다’ 더 강조하는 행위 언어입니다.

말씀 중의 말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적 모범이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진솔한 내용이자 강조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눈물’의 의미를 좀 묵상해봅시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역시 동참해서

울어야 할 세 차례의 현장이자 대상일 수 있으니까요.

 

 

-예수께서 (마리아)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나사로)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한복음11:33-35)

 

 

먼저,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는’,

초상집에서 우신 ‘그리스도의 눈물’을 살펴봅시다.

죽어서 썩은 냄새까지 풍기고 있는 사람은 ‘나사로’입니다.

부모님을 일찍이 여의고,

마르다와 마리아 두 누이와 함께 살고 있던 고아입니다.

그런 나사로는 평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별히

‘사랑하시는 자’(요한복음11:3)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인

고아였기에 되레 각별히 사랑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불행이 불행을 낳은 것일까요. 부모도 없이 살다 보니

여러 모로 어려운 점이 당연히 많이 있었겠지요.

그러다가 병까지 듭니다. 그러자 의지할 데도 없는 두 누이들은

서둘러 예수 그리스도께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이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병든 가족이나 이웃을 위한

오늘 우리의 응급 기도일 수 있습니다.

평소부터 각별히 ‘사랑하시던 자’가 병들었으면 기별을 받은 대로 당장 달려와서 고쳐주시든지 문병을 하는 것이 ‘상식’이자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상식이나 사랑은 우리의 그런 상식이나 사랑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당장 와보지도 않습니다. 죽도록 내버려둡니다. ‘죽은 지 나흘’이 넘도록 그래서 아예 ‘썩은 냄새까지 나도록’ 내버려둡니다.

인간적으로 대단히 섭섭하고 불만스러운 행태입니다.

평소의 각별한 관심이나 사랑은 거짓이었던 것일까요?

 

물론 전혀 거짓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agapee)이나 그 섭리는 인간 우리의 생각보다 늘 더 깊고 높고 오묘합니다. 그래서 때론 비정하리만큼 무관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차라리 ‘주무시는 하나님’이나 ‘죽은 하나님’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되레 우리의 ‘자기(自己)’라는 인간적 내지 세상적 내지 이성적(理性的) 상식이나 가치관이 차라리 썩어버리도록 내버려둔 침묵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인내를 가르치는 것이, 하늘나라의 초월을 가르치는 것이, 보다 큰 진실이자 영원한 구원이자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그리스도의 때’ 곧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찾아오십니다. 기도 응답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 두 누이로서는 이미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다 싶었겠지요. 당시로서는 중요한 관습이었던, 집안의 혈통을 이을 유일한 ‘오라비’마저 죽어버렸으니 절망이다 싶었겠지요. 사별(死別)은 큰 상처입니다. 일찍이 부모 잃고, 오라비마저 잃은 자매로썬 차라리 야속하고 무심한 하늘이자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버지’ 운운하는 주님이 역시 원망스러웠겠지요.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11:25-26)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신 후,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한복음11:44)

 

 

그렇게 나사로는 현재적으로 부활을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체험보다 되레 앞선 신비한 부활의 체험!

각별한 아니 대단한 긍휼이자 은혜이자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 ‘그리스도의 눈물’은,

한 마디로 인간의 개인구원, 작은 이웃의 구원을 위한

보다 심오한 눈물인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의 눈물’은,

상대적으로 사회구원 곧 조국의 구원

내지 인류의 구원과 참 평화를 위한 눈물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도정에서 흘리신 눈물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19:41-44)

 

 

저 예루살렘 멸망 내지 심판에 관한 예언은

사십여 년 후인 A.D. 70년에, 로마황제 디도(Titus)가 이끄는 로마군의 만행에 의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예언은 요한계시록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 예언의 성격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회나 조국이나 지구촌이라는 인류를 향한 종말론적 심판의 선포이자 그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것이 저 로마제국 황제인 디도 장군이 당대의 ‘적그리스도’일 수 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의 예언 그대로 ‘사탄이나 적그리스도나 거짓선지자’들이 오늘도 여전히 막강한 세상 세력으로 행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참 ‘평화에 관한 일’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참 평화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요?

대량의 군대와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거액의 돈이나 재물을 보유함으로써?

그것은 전혀 예수 그리스도의 해법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 중동의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지구촌 곳곳에서 빈발하는 지진 등의 천재지변이나 기근 같은 ‘종말의 징조’가 가까워 올수록, 우리 역시 사회구원 곧 조국이나 인류의 구원과 참 평화를 위해서 저 주님의 모범처럼 울며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참 구원과 참 평화에 관한 일은 오직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 곧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한 구원의 보살핌을 받는 날’의 비밀이자 ‘하늘나라의 비밀’이자 ‘복음의 비밀’을 아는 그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의 눈물’은

‘십자가’라는 ‘죽음의 잔’을 목전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게 고뇌하며 흘리신 눈물입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며 흘리신 눈물입니다.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브리서5:7-10)

 

 

‘하나님의 아들’ 곧 ‘참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육체을 입으신’ 인간 곧 ‘참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극한의 고통 앞에서 번민도 신음도 앓았고 통곡도 했고 눈물도 흘렸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영지주의(靈知主義)자들의 주장처럼 도깨비(?) 같은 ‘가현설(假現說)’의 존재도 아니고, 삶과 죽음을 손쉽게 오가는 저승사자 같은 판타지형 인물도 아닌, ‘참 인간’이었다는 것이 되레 반증됩니다.

판타지형 인간이나 로버트형 인간처럼 아무런 고통 없이 죽음을 이길 수 있었다면, 저부터도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모르는 자는 인간의 참 구원을 위한 ‘대제사장’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피와 땀’이라는 인간의 눈물이나 고난 내지 고통의 막장을 모르는 자가 머리에 든 지식이나 이론만으로 남을 구원하고자 하는 ‘제사장’으로 나서면 피차 불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것이 문호 괴테가 그랬지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고,

 근심에 찬 밤을 울면서 지새워 보지 않고는,

 인생의 참 맛을 모른다.-

‘인생의 참 맛’만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참 구원의 맛’도 모릅니다.

 

 

각설하고,

그리스도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이자

극한의 고통의 현장은 골고다 십자가 그 현장이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원함과 아버지의 원함’이 충돌하는

겟세마네 동산 저 현장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원함’은 ‘죽음의 잔’, ‘고난의 잔’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

 

 

인생 범사에서 ‘나의 원’ 곧 ‘내 뜻’, ‘내 소원’인즉 이렇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 및 간구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믿음이 작은 일도 아니고, 죄가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기도와 간구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물론이고, 사도 바울처럼 ‘육체의 가시’의 문제도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과연 ‘그러나’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전적 맡김입니다. 전적 위탁입니다.

진실로 그것이 최고의 기도이자 최고의 겸손입니다.

몸을 낮추는 것이나 ‘나귀새끼’를 타는 검소한 삶도 겸손이지만,

최고의 겸손은 삶 내지 죽음 자체를 통째로 ‘아버지의 뜻’에 맡기는 그것입니다.

최고의 자유이자 절대 자유도 오직 거기서 나옵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기도는,

이기적인 아집이나 야심이나 기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겸손하게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세상의 세속사(世俗史) 중심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구속사(救贖史) 중심으로 인생 내지 천지를 운행 및 역사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여느 말씀보다 더 위대한 ‘말씀 중의 말씀’이자 웅변이자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저 ‘통곡’이나 ‘눈물’은 자기 설움이나 한을 위한 그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 뜻’을 부인하고 구속사를 위한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위한, 기도를 통한 치열한 자기 부정이자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거기서,

주님께선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분명하게 받은 것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받으면 고난도 더 이상 고난이 아닙니다.

죽음도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절대 자유, 참 자유가 있을 뿐입니다.

절대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순교 내지 죽음보다 더 큰, 영(靈)의 신비의 세계를 친히 보았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한’ 인간 자기의 한계를 깨닫고 이후 저 ‘천명(天命)’을 기다렸던 공자(孔子) 같은 훌륭한 이성(理性)이나 성현마저도 보지 못하고 들을 수 없었던, ‘사흘 후’에 주어질 부활의 신비이자 영광에 열린 것입니다. 그렇게 일생일대의 최고의 위기 내지 곤경에서 그것을 능히 이기는 영성의 비밀을 친히 가르쳐주신 예수 그리스도!

 

 

공생애 기간 동안

세 차례 우신, ‘그리스도의 눈물’.

우리도 그 모범을 본받아서,

우리 인생 개개인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보다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위해,

간구하며 통곡하며 울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나사로의 구원 곧 인간 자기를 포함한 이웃 내지 지극히

작은 이웃의 ‘개인구원’을 위해 울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나아가 나라와 민족 및 지구촌의 구원 곧 ‘사회구원’을

위해서 울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지난날, 당신은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진실하게 울어본 적이 있었습니까?

앞으로, 우리는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진실하게 울어볼 수 있을까요?

진실로 울어야 할 때 진실로 울어보지 못한 우리라면

실인즉 헛된 인생을 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럴 것이

‘눈물’은 ‘긍휼’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으니까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고보서2:13)

 

 

                                                                       (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