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에 진도 근해에서 발생한
대형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건에 관한 뉴스를
지켜보면서, 토마스 아 캠피스의 말씀처럼
“모든 일이 십자가 안에 존재하며 모든 일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현재적으로 절감해야 했습니다.
먼저 사망자 및 실종자 가족들에게 삼가 애도와
위로의 드리며, 기적을 통해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어서 속히 구조될 수 있기를 깊이 기도드립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침몰한 여객선에서 일찍이 탈출을 해버렸고,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그게 더 안전하다”는
내용의 ‘안내방송’을 그대로 믿고 따른 저 어린
학생들 대다수가 여전히 실종 상태로 있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고, 울분까지 느끼게 됩니다.
뉴스에 의하면,
인천항에 짙은 안개가 끼었는데도,
그래서 모든 배가 출항을 하지 않았는데도,
유일하게 여객선 ‘세월호’만 출항을 했다더군요.
국내 최대급 대형여객선이라는
자부심에서 감히 강행한 출항이었겠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울돌목’에 이어 두 번째로
물살이 맹수처럼 거칠고 빠르기에 모든 배가
위험해서 선회하지 않는다는 ‘맹골수도’에서 무모하게
급선회를 시도하다가 침몰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출항이나 급선회 그 자체부터가 ‘대형여객선’이라는
물질주의 내지 자본주의를 과신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오늘 우리 사회
‘우리 어른들’ 내지 기성세대들의 어리석은 용기이자 교만일
수 있다 싶어 한편으론 부끄러움과 책임감도 느끼게 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니라.-(야고보서4:14-16)
물질주의 내지 자본주의 시대는 다투어 ‘대형’을 좋아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종교조차도 ‘큰일을 하려면’ 대형의 조직이 필요하고
그 자체가 곧 권력 내지 세력이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의 가치관이 대형 참극(慘劇)을 늘 자초 및 자행한다는
것도 우리는 또한 유념 및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것이 정치나 경제라는 이름으로 또한 종교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그 대형 조직의 잘못된 ‘안내방송’이나 그 권위에서 오는 메커니즘을 그대로 믿고 따른 저 순진하고 저 어린 학생들 같은, 수많은 생명들이 오늘도 우리 사회에서 직접 간접으로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는 형국일 수 있으니까요.
‘대형 여객선’이기에 되레 국가적인 불행 내지 국민적인 불안이나 트라우마를 야기할 수 있는 ‘대형 참사’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주간’에 발생한 저 여객선 참사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아닐까요?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는’ 희생이나 헌신의 삶이 준비되지 못한, 무책임한 어른들 곧 ‘삯꾼 공직자’나 ‘삯꾼 선장’이나 ‘삯꾼 목자’들은 차라리 ‘항해의 키’를 잡지 말아야 합니다. 수많은 이웃들의 생명을 위해서 말입니다.
-나(예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요한복음10:11-12)
그렇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죽음이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온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이라는 영광의 텍스트(Text) 그 자체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의 몫일 수 있는 작은 이웃들 내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저 고난이나 희생이나 헌신이라는 전후 관계의 삶 곧 컨텍스트(Context)에 보다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기적인 ‘몸보신’의 가치관이 득세하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 곧 ‘공직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평민들 내지 평신도들일 수도 있는 저런 ‘선장이나 선원들’에게 헌신적 삶의 모범을 보이지도 가르치지도 못한 ‘우리의 죄’, ‘우리의 허물’을 먼저 충심으로 회개하면서 말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자기의 죽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라는 ‘내 몫의 죽음’이 없으면 ‘내 몫의 부활’도 없습니다. ‘내 몫의 고난’이 없으면 ‘내 몫의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없으면 ‘우리의 부활’도 없습니다. 그것을 명심하는 것이 저 여객선 참사를 통해, 어른들의 무책임한 행동을 통해, 고통스럽게 죽어간 수많은 어린 생명들의 유지를 헛되지 않게 살리는 길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적인 ‘초상집’이 된 오늘
이 자리에서 진정으로 선포할 수 있는 구원의
‘참 복음’이 무엇인가를 진실로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자리에서 세상의 물질주의 내지 자본주의 가치관을 따라가는 곧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누리고 사는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다”라는 유형의 ‘번영복음(Prosperity Gospel)’을 선포한다면, 그런 사람은 차라리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선포할 수 있는 복음이 되레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이자 순수한 복음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일 수도 있는 ‘세상의 복’을 강조하는 유형의 가치관의 한계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충심으로 회개하고, 영원한 ‘부활의 생명’과 ‘부활의 가치관’을 강조 및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righteousness)와
평강(peace)과 희락(joy)이라.-(로마서14:17)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나라 중심으로 살았던,
집약된 사도 바울의 가치관이자 ‘부활의 가치관’입니다.
우리의 신앙선배들인 한국초대교회 역사가 그랬듯이,
심령의 중심에 ‘성령의 의와 평화와 기쁨’이 있으면
불의도 가난도 기갈도 탐욕도 인간 차별도, 억울한 죽음조차도 능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자들답게, 부활한 자들답게, ‘세상의 빛’이자 ‘세상의 소금’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오늘의 우리도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교회당 안에서 찬양하고 예배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초대교회 선배들처럼 부활의 생명과 부활의 가치관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세상의 빛’이자 ‘세상의 소금’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 둘 곳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 역시 먹고 마시고 누리는,
세상의 재물이나 소유가 남달리 많았기에
빛과 소금이 되었던 분들이 결코 아닙니다.
‘자족(自足)의 비밀’을 알았던 그분들 역시
평범한 서민인 저보다 되레 더 가난하게 살았고,
사심 내지 욕심 없이 사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저도 저분들을 믿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분들의 삶이 웅변하듯이,
사람은 돈이나 떡이나 육체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살릴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살릴 수 있습니다.
‘가난한 교회’가 되레 가난한 자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대형화될수록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서라도 정치적이고 경영적이고 권위적인 관심이 상대적으로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부자교회’는 가난한 자나 병든 자나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인간 이해나 존엄성 이해에 있어서도 왜곡과 간극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너희는 죄가 많아서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식의 ‘바리새인적 가치관’ 내지 ‘기복신앙적 가치관’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그리스도의 제자’ 내지 ‘목회자’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부유하신 분이지만 그러나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고자하는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소유가 많으면 그 소유가 되레 ‘그리스도의 일’을 망치게 하고 아울러 ‘자기 일’조차도 망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역설의 비밀이자 영성의 비밀에 열려져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부활의 가치관’을 서둘러 회복하는 것이 비판받고 있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숙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막말로 하나님을 안 믿어도, ‘먹고 마시고’ 살 수는 있습니다.
성공해서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청소년들도 다 압니다.
따라서 ‘이방인들’도 다 알고 있고, 다 구하고 있고, 다 누리고 있는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똑같이 구하고 누리는 것이 정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참 복음은 ‘이방인들의 가치관’ 그 이상 것을 말씀하고 있고 또한 말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어”, 기쁘게 고난을 받으며 헌신 및 희생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의 선포나 삶의 모범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까? 불문가지 아닙니까? 상대적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라는 비판이 교회 내외에서 자주 회자되는 것도 그에 대한 반응이자 역풍인 것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그것은
‘돈이나 떡이나 육체’ 중심이 아닌 곧 세상 중심이 아닌,
‘하나님나라와 그 의와 평안과 기쁨’ 중심의 거룩한
복음이자 영원한 복음을 서둘러 회복하는 숙제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세상에서 죽어도 사는’
부활의 복음이자 부활의 가치관을 회복하는 숙제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처럼 모든 율법적 내지 세상 복(福) 차원의 가치관이나 정죄로부터 비로소 자유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이나 불행이나 박해나 죽음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복음입니다.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6:8-10)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도 바울이 세상을
향해 선포한 저런 가치관 중심의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또한 저 여객선 ‘세월호’ 참사의 사상자들이나 그 유가족들처럼 졸지에 큰 불행을 당한 분들에게도 그 불행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영원한 구원의 복음과 하늘의 ‘산 소망’을 진솔하게 증언 및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형극의 십자가 저 처참한 죽음의 길이자 순교의 길을 자원해서 의연하게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도 있다면서, 우리 모두 “이 세상의 삶보다 더 좋은 부활의 삶이 있다”는 것을 믿자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 “영원한 하늘나라의 안식이 있다”는 것을 믿고, 세상에서의 죽음은 또한 하늘에서의 탄생이자 시작이라는 것을 믿자고 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11:25-26)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을’ 정도로 중병을 앓던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얻어먹고 살다가 마침내 죽습니다.
막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부자와는 거리가 너무도 먼,
기구한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그 나사로가 그 후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으로 갔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음부’ 곧 ‘지옥’으로 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나사로가 하나님을 잘 믿었다는 말도 없고, 그리스도를 잘 믿었다는 말도 없고,
선행이나 헌금을 많이 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하긴 성전이나 회당에 가고 싶어도 갈 수조차 없었겠지요.
그런 나사로가 ‘낙원’에서 안식을 하고 있다니?
세상의 상식이나 가치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가치관’은 그렇듯 인간 우리의 율법적 내지 신앙교리적인 기준이나 지식조차 뛰어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나사로가 ‘낙원’으로 간 이유나 부자가 ‘지옥’로 간 이유는 다만 이렇습니다.
-얘 너(*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누가복음16:25)
나사로의 저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처럼 의로운 고난도 거룩한 고난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우리 인생이 앓는 기구한 고난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조차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과 신비는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신비', 우리는 정작 그것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어설픈 기복적 교리나 율법이나 신앙 내지 신학지식으로 고통 받는 작은 이웃들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정죄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몫의 역할이 있다면,
세상에서 모진 ‘고난을 받으며’ 살다가 안타까이 죽은
모든 영혼들에게, 저 ‘나사로’처럼 하늘에서 안식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겸손하고 진실하게 기도해주는 그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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