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주택가 거리에서,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채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어린소녀가
돌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야, 나비다!”
저는 어린소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흔하게 보는 노랑나비 한 마리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 어린소녀에게는 그것이 대단한 발견이었던가 봅니다.
재미있다고 할까 아니면 대조적이라고 할까 싶은 것은, 그 어린아이의 엄마의 말이자 반응이었습니다. 여전히 스마트폰에 눈길을 두고 있는 엄마는 어떤 다른 생각이나 계산을 골똘히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비’를 반기는 어린 딸의 말이나 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던 걸음 그대로 딸의 손을 와락 잡아채며 퉁명스럽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얼른 와!”
어린소녀는 무안했던 것일까요. 제풀에 싱거워졌던 것일까요. 옹색한 표정을 지은 채, 하릴없이 ‘하늘의 나비’를 뒤로 하고 엄마의 손에 이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영 말이 통하지 않는 그 엄마와 그 어린 딸.
저 젊은 엄마는 어린 딸에게 ‘나비’에 관한 관심을 도와주고 키워주는 것보다는 ‘아이스크림’ 하나 더 사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린 딸에게 보다 많은 아이스크림을 사주기 위해 보다 많은 돈이나 정보가 필요하고, 그런 현실적 삶의 타래에 매여 ‘하늘의 나비’에게 눈길을 줄 한가한(?) 여유 같은 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 젊은 엄마도 어린소녀시절에는 ‘나비 한 마리’를 보며 손짓하던 나이브한 기쁨의 시절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퇴색한 왕년의 추억일 뿐인 것일까요. 그럴 것이 “얼른 와”라는, 차라리 짜증스럽게 들리는 엄마의 반응에서 현실적 삶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의 무게가 또한 느껴진다 싶으니까요.
물론 그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나 대조적 가치관의 차이는 저 특정 모녀의 얘기만은 아닙니다. 그럴 것이 그것이 바로 세상 내지 현실을 사는 모든 우리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의 가치관의 차이이자 관심이나 선망에의 차이일 수 있다 싶으니까요.
프랑스 작가 쌩 떽쥐빼리는
‘어른 위한 동화’인〈어린왕자〉에서,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의 가치관을
대비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은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정작 긴요한 것은 물어보지 않는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지? 나비를 채집하고 있니?”
이런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는 몇이고?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의 수입은 얼마야?”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줄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턱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거 정말 좋은 집이구나!”하고 소리치는 것이다.-
오늘의 세상을 사는 우리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우주관은 과연 어느 쪽일까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동화적 가치관이
꿈이자 낭만일 수는 있어도, 세상을 살아야 하는
현실적 지식이나 현명한 삶의 지혜가 될 수는 없다고요?
맞습니다. 솔직한 표현인즉 그것이 우리 ‘어른들’의 답입니다.
‘나비’를 보고 기뻐하며 소리치는 가치관이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고 소리치는 가치관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어른인 우리에게 늘 먼저 필요한 것은 ‘하늘의 나비’보다는 ‘세상의 십만 프랑짜리 집’이자 돈이자 물질이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 구원의 해법도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 어른들의 가치관은 되레 ‘끝없는 정욕 및 탐욕’이라는 문제의 시작이자 ‘공허와 흑암과 혼돈’의 시작일 뿐이니까요. 평생을 그것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타락한 정체성이자 타락한 가치관에 길들여지는 세뇌이자 미혹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 주(主人)되시고
세상의 참 주(主人)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남보다 ‘어른’ 되기를 좋아하고 ‘큰 자’ 내지 ‘높은 자’ 되기를 좋아하는 제자들이나 스스로 유식하다는 세상 교육을 향해, ‘진실로 복이 있는 인생의 가치관’을 이렇게 단호하게 설파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18:16-17)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 어른 된 자’의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의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리라”가 아닙니다. “들어가지 못하리라”도 아닙니다.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will never enter it)”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도 ‘우메 에이셀데이’라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중적 강조어법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사는 저 ‘어린아이의 가치관’은 인간 우리의 호불호의 문제나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다 심각한 절대 가치관의 문제이자 숙제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좀 막연하다 싶으면,
‘어린양’의 모습을 묵상하면 보다 쉽게 풀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양’의 모습은, 사자의 그것도 아니고, 호랑이의 그것도 아니고, 뿔로 이웃을 자주 들이받는 염소의 그것도 아닙니다.
힘이 약한 어린양은 겸손하고 싶지 않아도, 도리 없이 겸손할 수밖에 없는 분수입니다. 체 하는 겸손도 아니고, 외식하는 가장된 겸손도 아니라는 것. 인간 자기의 약함 내지 분수 내지 한계를 아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참 겸손인 것입니다. 거기서 또한 오직 ‘어버이’만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어린아이’의 모습, 오직 ‘선한 목자’만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어린양’의 모습이 절로 우러나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참 겸손’의 모습과 ‘참 신앙’의 모습은 하나로 통합니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베드로전서5:5)
그렇습니다.
중심이 참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참 신앙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오늘도 그렇게 ‘까마귀’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창조주 하나님은 그래서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 섭리 그 역사를 어린아이처럼, 저 공중의 까마귀처럼, 저 들의 백합화처럼 겸손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다면, 또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입고 산 자들은 의식주 문제는 물론이고, 심지어 죽음의 문제조차도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는 그것입니다. ‘어린아이’나 ‘까마귀’나 ‘백합화’는 설령 병이나 사고로 남들보다 일찍 죽는다쳐도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는 문제는 물론이고, 죽는 문제조차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엄마, 나 죽는 거야?
아빠, 나 죽으면 어디도 가?
하늘로 가는 거야?
나 엄마 아빠와 헤어지기 싫은데…?”
그 정도일 뿐입니다.
애통하며 괴로워하고 슬피 우는 쪽은 늘 우리 ‘어른들’ 아니던가요? 죽음조차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따라서 ‘어린아이들’은 세상을 이기는 ‘현재적인 천국’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닳아진 어른’이 되면 될수록 되레 잃어버리는 ‘동심(童心)의 세계’라는 천국 말입니다.
또한 어린아이는 그 마음이 참 순진(純眞)합니다.
참 천진(天眞)합니다.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물질적 욕심 내지 탐심이나 육체적 음욕 내지 정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내지 세속의 각종 욕망과 탐욕으로 오염된 우리 어른들의 마음과는 달리, ‘마음이 꾸밈이 없고 참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그만큼 해맑은 하늘 내지 하나님나라와 가깝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린아이의 저런 태생적인 심성은 유식한 세상 교육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차라리 무식하고 무능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혹은 지식인들처럼 유식하지 아니하거나 유능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적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건전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올바르게 ‘믿는 것(信仰)과 아는 것(神學)’에 대한 공부나 교육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는 ‘깨끗한’ 심령 내지 심성의 세계는 세상적 지식이나 능력에서 오는 상대적 비교나 교만의 가치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린도후서7:1)
또한 어린아이의 모습이나 생각은 참 단순(單純)합니다.
크게 고민하거나 염려하거나 열등감이나 우울증이나 염세의식 등에 빠진 ‘어린아이’는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기 머리를 굴리며’ 늘 염려하고 근심을 합니다. ‘내일 일까지’ 혹자는 자녀와 손자손녀 등 삼대까지 먹을 것을 비축하고 상속하느라 염려하고 부심을 합니다. 그것이 진실로 현명하고 능력 있는 어른의 지혜일까요?
자기가 사는 하늘에만 태양이 떠있다는 것을 믿고, 자녀나 손자손녀들이 사는 하늘에도 역시 태양이 떠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소치가 아닐까요? 내일의 태양은 내일 또 뜹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태복음6:34)
영국시인 윌리엄 워즈워즈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노래했지요.
33세의 젊은 나이에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난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라고 당부했지요.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실인즉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어른인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으로 살고 있는 스승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스승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미 보신 그리고 크게 평가하신 동심의 비밀이자 그 은혜의 세계를 ‘어른들’이라는 우리는 여전히 보지도 못하고 거기서 배우지도 못하고 있다는 데 있겠지요. 참 가치에의 어둠이나 그 왜곡에 있겠지요.
말을 바꾸자면,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 내지 스스로 ‘어른’이라는 허위의식이나 그 허상에 사로잡혀 참 행복과 안식의 나라를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되레 ‘속물화된 인간형’으로 가르치려고만 든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바리부인〉이라는 명작을 남긴,
프랑스 작가 플로베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물오리는 날 적부터 헤엄을 치듯이,
어린이들은 나면서부터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
어린이들이 하는 일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물오리가 헤엄을 치지 못하게 하는 거나 다름없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려면,
그 천성을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아이의 저 ‘착한 천성(天性)’을 살려주고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되레 죽여주고 버려버리도록 거꾸로 ‘도와주는’,
우리 어른들의 가치관이나 그런 삶의 모습이나 행태는 아닐까요?
분명한 것은 스스로 주인(主人)이 된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어른의 세계’가
영원히 사는 것도, 영원히 승리하는 것도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처럼 모든 인생 내지 어른의 세계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가치는, 참으로 복이 있는 가치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이자 그 승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태복음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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