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자연 속에서 들리는 '그의 음성'

이형선 2014. 5. 26. 10:40

 

 

푸른 초목들이 숲을 이루고,

어린이나 어버이나 스승 등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꽃’으로

피어나는 오월은 아름답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천연색의 은혜,

합력해서 선(善)을 이루는 공존의 은혜,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듯한 자연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무신론’ 운운하며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divine nature)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로마서1:19-20)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은

그래서 진실로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만드신 만물’ 곧 헬라어 ‘포이에마(poyeema)’는

저기서 ‘신이 만드신 작품(a work)’임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집니다만, 그러나 만물 중에서 가장 타락한

피조물이 또한 우리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지만

타락하면 자기 머리 내지 마음을 굴리며

가장 사악해지고 추악해지고,

가장 염려도 걱정도 근심도 많아지는

피조물이 또한 우리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예레미야19:7)

 

 

물론 ‘꽃 중의 꽃’ 장미에게도 ‘타락한 부패성(?)’ 혹은 ‘모순’은 있습니다.

‘가시’라는 ‘사악성(邪惡性)’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 가시를 ‘순수한 모순’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이자 섭리 자체인 자연 속에도 우리네 인생 여정의 이런 저런 우여곡절이 그런 것처럼 때론 모순처럼 보이고 때론 불행한 것처럼 보이는 ‘가시’ 같은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와 ‘장차 오는 세계’의 차원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외려 자연스럽게 자연을 살리고 지키는 순리가 되고 은혜가 되고 선이 됩니다. ‘배반의 모순’이 아니고 ‘순수한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꽃이 시들고, 식물이나 동물들이 안타깝게 죽는 자연의 섭리조차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아름답게 잘 만들어진 대형 공원이나 정원, 하천, 로버트인간 등이

인간의 ‘성공한 작품’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진정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아닙니다. 자연 속에 깃든 신성(神性) 내지 영성(靈性)이 거기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 곧 ‘거듭난 작품’도 아닙니다.

그렇듯 진실로 인생을 살리는 구원 및 행복의 비밀은 인위적인 세상의 ‘내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이라는 자연 속에 계시된 이른바 ‘자연계시’ 내지 ‘일반은총’이라는, 그 ‘하나님의 영성’에 열려질 때 비로소 주어진다고 성경은 또한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친히 주신 ‘특별계시’이자 ‘특별은총’인 성경의 '말씀'을 통해, 인생을 포함한 자연 속의 저 신성(神性)의 비밀이 명확하게 증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

자연을 찾아 야외로 소풍 나가서,

당신은 무엇을 보고 들었습니까?

초목을 보고 숲을 보고, 꽃을 보고, 산하를 보았다고요?

다 좋습니다만, 죄다 ‘하나님의 신성(神性)’과는 거리가 멀군요.

‘하늘을 우러러’서는 무엇을 보고 들었습니까?

코발트 빛 허공을 보고, 최신형 비행기를 보고,

태양을 보고, ‘돈다발을 세다 잠드는 꿈과 비전’을 보았다고요?

다 좋습니다만, 죄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와는 거리가 멀군요.

 

 

‘포이에마’ 속에 살아계신 존재이자

예술 자체이신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보고

아울러 ‘그의 음성’을 들은,

한 무명의 시편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므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시편95:2-8)

 

 

그렇습니다.

땅의 깊은 곳도 산들의 높은 곳도,

바다의 비밀도 육지의 비경도 다 하나님의 것이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인생의 깊은 곳도 인생의 높은 곳도

다 하나님의 것이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그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우리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들었다면 해답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가 ‘기르는 양’이고,

양은 오직 ‘선한 목자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살아도 안식할 수 있고

죽어도 안식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그 ‘은혜의 품’ 그 자체가

바로 지고한 구원이자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진실로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의 모습일까요?

자기 등에 탐욕 내지 탐심 같은 ‘짐’을 잔뜩

짊어지고 있는 소나 말이나 노새의 모습은 아닐까요?

개나 돼지나 염소의 모습은 아닐까요?

스스로 주인이자 왕이라고 자처하는

사자나 호랑이나 늑대나 이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양이 자기의 분수를 잃어버리거나 자기의 길에서 빗나가서,

사자나 호랑이처럼 스스로 주인 내지 지배자 행세를 하거나 돼지처럼 탐욕을 부리는 모습이 유능하고 실속 있고 지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그 자체가 바로 ‘완악’이자 ‘교만’이자 ‘패망의 길’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이자 허무한 실속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사 내지 인생사가 고달픈 것도 다 스스로 ‘섬김을 받는 큰 자’가 되고자하는 그런 어리석은 만용이나 하찮은 영웅의식 같은 자기과시에서 비롯되는 것 아니던가요?

물론 정당한 노력의 댓가인 ‘성공’이나 ‘큰 자’가 되는 그 자체는 보람이자 축복입니다.

문제는 늘 그 ‘성공’이나 그 ‘큰 자’의 사회적 관계성이나 인격성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웃(人間)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친히 ‘섬기는 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자 지배자였지만 미천한 종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고, 의인이었지만 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을 섬기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이 앓거나 배가 고프면

양들보다 되레 더 큰 고통을 느끼는 분입니다.

선한 어머니가 어린자식들이 앓거나 배가 고프면 어린자식들보다 되레 더 큰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긍휼이나 자비의 마음 역시 섬김의 도입니다. ‘모성애’라는 본능적 마음의 세계 역시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그것처럼 무형의 ‘포이에마’이니까요. 성경은 또한 그런 모성애의 본질이자 진정한 주체는 하나님이자 ‘선한 목자’이신 그분 자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10:10-11)

 

 

      

        *  *  *

 

  주님.

  우리로 하여금

  자연 속에서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성경 속에서

  친히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선한 목자’의 비밀을

  알게 하소서.

 

 

  그래서

  당신만을 굳게 믿고

  굳게 의지하는

  양(羊)의 삶이게 하소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당신의 길만을

  올곧게 따르게 하소서.

  죽음 앞에서도

  가치 있는

  그래서

  허무하지 않는

  구원의 일생이게 하소서.

 

 

  사자나 호랑이나 이리도

  되지 말게 하시고,

  개나 돼지나 염소도

  되지 말게 하소서.

  끝까지 양이게 하소서.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양이게 하소서.

  뜻이 있어

  무릎을 꿇을 줄 아는,

  당신의 양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