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과연 희비와 명암이
엇갈리고 공존하는 무대입니다.
6·4 지방선거 당선자들의 환호와 기쁨이
클로즈업 되고 있는 그 시각에,
낙선의 뒤안길에서 자살했다는 분들의
‘일단의 기사’를 또한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강원도 인제군의원이던 어느 분이 3선에 도전했다가 낙선하자
자살했다는 소식과 서울 구의원에 출마했던 50대의 어느 분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비보를 접하면서 공감의 안타까움보다는 황당한 안타까움을 더 느껴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존엄성 내지 생명의 존엄성이나 그 가치가 정작 일개 ‘군의원’이나 ‘구의원’ 자리보다 더 못한 것일까요? 나름대로 뜻한 바나 목적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나 ‘칠전팔기(七顚八起)’ 같은 응분의 각오나 지혜나 용기도 필요한 것 아닐까요?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라는 우리 한국사회의 생명경시풍조 내지 가치관의 단면을 또 확인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아울러 저는 몇 달 전에 있었던, 같은 자살 사건이지만 우리 사회에 아프도록 진한 공감의 안타까움과 함께 양극화된 빈곤문제와 복지사각지대에 대한 관심을 숙제로 남겼던 ‘송파구 세 모녀의 죽음’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반지하 월셋방에 살면서, 이미 성인이지만 희귀질병에 걸려 일을 할 수 없는 딸을 부양하면서 꿋꿋하게 살아온 어머니. 그러나 몸마저 다쳐서 막일 내지 허드렛일조차도 할 수가 없자 막다른 생활고를 남몰래 앓다가, 집주인에게 “미안하다”는 유서와 함께 마지막 월세금과 공과금을 남기고 동반 자살을 했던 세 모녀. 저들의 죽음이 같은 하늘 아래서 아직 살아있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되레 죄지은 듯 ‘미안하게’ 만드는 것은 또한 어인 일일까요?
아무쪼록 저분들의 영혼이 더 이상 질병도 가난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안식하실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역시 죄인들인 우리 인간의 마음에도 후자의 죽음은 진한 연민과 애도의 공감을 느끼게 하는 만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 정상을 참착해주시어 응분의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고 싶으니까요. 물론 그것은 종교적이나 율법적인 도그마 내지 교리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한 기대일 수 있습니다. 그럴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은 율법이나 교리 그 모든 것을 완성하고 포용하는 그 이상의 세계이니까요.
따라서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역시 부족한 죄인인 인간이 자기의 어설픈 종교적이나 교리적 지식에 의거해서 독단적 비판 내지 심판적 발언을 하는 것은 분수에 지나친 망발(妄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겸손하게 보류해 두고 맡겨둬야 할, 오직 ‘하나님의 영역(His part)’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은,
성경은 자살이나 타살을 막론하고
모든 살해 행위를 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You shall not murder.)-(출애굽기20:13)
히브리어로 ‘로 티르차흐’입니다. ‘죽이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살해하지 말라. 오살하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강조이자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나아가 동물이나 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것이 모든 생물의 생명의 주인 역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인즉 우리가 세상에 ‘한 생명’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나 생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살해 행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이자 도전이자 도발이 됩니다. 타살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을 죽이는 자살이라는 행위도 역시 그렇습니다.
나아가 모든 식물이나 동물의 생명도 함부로 오살하거나 필요 없이 ‘죽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을 수밖에 없는, 같은 피조물의 관계이자 ‘공존의 관계’이니까요.
저 말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화된 설명이자 해석을 직접 들어봅시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 멍청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복음5:21-22)
그러니까 외적사건이라는 결과로서의 살인만이 끔찍한 살해행위가 아니고, 형제자매를 ‘바보, 멍청이, 미련한 놈’이라고 함부로 비하하며 차별적인 욕설을 하거나 판단을 하고, 멸시 및 천대하는 행위 같은 그런 원인이나 내적 동기부여 자체 역시 동일한 살인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eternal life)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도 아는 바라.-(요한일서3:15)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마음으로 ‘미워하는’ 그 자체부터가 바로 살인행위입니다. 그 마음에 이미 ‘지옥’이 들어온 것입니다. 남들을 놀리며 차별하며 멸시 천대하고 따돌리는 행위 역시 그래서 다 간접살인행위가 됩니다. 그 마음에 이미 ‘악령’ 및 ‘지옥’이 들어온 것입니다.
형제를 ‘바보, 미련한 놈’이리고 비하하고 천대하면 상대적으로 자기는 ‘현인, 영리한 놈’이 될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 마음에 이미 ‘영원한 생명(永生)’이나 그 진정한 존엄성이나 가치가 거하지 않는다는 반증이 될 뿐입니다. 자기 심령이 거칠어지고 교만해져서, 스스로 불행해지고 있는 반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 병든 그리고 가난한 ‘송파구 세 모녀’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생전시에 ‘바보, 멍청이, 미련한 년들’이라고 외면 내지 무관심했거나 천대했거나 멸시했던 그런 우리 한국사회이자 교회라면, 그런 한국사회의 물질 내지 경제우선주의나 그 구조적 병폐나 교회의 가치관 자체가 저들을 자살로 인도한 가해자이자 공범자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가 일개 ‘구의원’이나 ‘군의원’ 같은 신분이나 자리보다 더 못한 것이라는 그런 천박한 성공의식이나 권력의지나 번영신학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이자 교회라면, 그런 한국사회나 교회의 가치관 자체가 저들을 또한 자살로 인도한 가해자이자 시대적 공범자일 수 있습니다.
그런 동시대적 의무와 책임을 통감하지 못하고, 작금에 소위 ‘기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조차도 줄지어 ‘막말’을 일삼으며 되레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회자되던데, 우리는 그 병폐를 확실하게 구별 및 분별하고 그런 ‘지도자들’의 행태를 본받아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외적 사건으로의 살해행위를 저질러서도 안 되겠지만, 이른바 ‘주둥이’나 ‘펜대’를 함부로 놀려서 내적 살인행위를 저질러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진리는 최후의 평가도 최후의 심판도 오직 하나님의 몫이자 영역이라는, 그것이니까요.
상대적으로 우리 몫이자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오래 참으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는 그런 삶이겠지요.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지 못한 ‘우리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면서 말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지요.
-인생의 참된 목적은
영원한 생명(永生)을 깨닫는 데 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은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아닙니다.
그 소유나 성취가 참된 성공도 아닙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은 ‘영원한 생명’이자
영원한 구원 그 자체입니다.
인간이나 생명의 가치를 경시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자살사건이 빈발하는 것도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고
그 생명 그 가치를 얻지 못한 때문입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그 진면목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못한 소치입니다.
그럼 ‘영원한 생명’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이자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세기1:27)
그러나,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는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주신 말씀에 불순종하고,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어버림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 곧 ‘영(靈)이신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고 다만 ‘육체’가 된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죽음에의 운명이 되고만 것입니다.
‘선악과’ 그 ‘금단(禁斷)의 말씀’은 태초의 시대에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의 한계’이자 ‘윤리도덕성의 한계’입니다. 출애굽 이후 시대에 계시를 통해 주어진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 등이 역시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그 ‘금단의 말씀’을 ‘따먹어버리면’ 하나님이 죽는 것이 아니라 되레 인간 자기가 죽습니다. 인간들을 위해서 주신 ‘금단의 열매’이자 ‘금단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인간 자기의 자유의지를 부인 내지 절제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임의대로 따먹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영적 생명이 죽은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 죽었으니 영(靈)이신 하나님과의 모든 소통의 관계가 단절되는 수밖에요. 그것이 모든 인생에게 고난과 저주와 불행과 죽음이 주어진 절대원인이자 절대요인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조상 ‘첫째 아담’은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그 후예인 우리 모두를 대대로 고난과 불행과 죽음으로 인도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의 회복의 문제는 곧 역사 대대로 절대 구원의 숙제이자 숙원이 됩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도 거기서 비롯됩니다.
그런 인생들에게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주고자 마침내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십니다.
새로운 인류의 조상 ‘둘째 아담’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에 의해 대대로 예언 및 계시된 그대로,
마침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선포하신 말씀을 들어봅시다.
-영생(eternal life)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17:3)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거듭나서
‘참 하나님의 생명’이자 ‘그리스도의 생명’인
그 영적 생명을 내 안에 소유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라디아서2:20)고
고백하는 문제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는
인간 및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 자체부터가
달라집니다. 또한 달라져야만 합니다.
세상의 소유나 탐욕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과 나라 중심으로
그 가치관이 확실하게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은 ‘송파구 반지하 월셋방’에서 살아도 아니 그리스도처럼 머리 둘 곳조차 없어도 의연하게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갈 수 있습니다. ‘군의원’이나 ‘구의원’ 선거에 낙선해도 더 크고 더 높고 영원한 ‘십자가의 고지’를 바라보며 봉사와 희생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해도, 몸이 병들어도, 장애인이 되어도, 열두 번 낙선을 하고 실패해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는 너도 나도 영원한 소망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는 ‘지극히 작은 자’인 사회적 약자들도 다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잘난’ 너도 ‘못난’ 나도 다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직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너도 다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진정한 인간 이해 곧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거기서 비롯됩니다.
그런 자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할고’,
지하굴 감옥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하며,
달고 쓴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항상 기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까지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1:21)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의 담대한 고백이자
진실로 부러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진 박해와 형극의 고통도 기쁘게 받아들이며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기왕 그리스도를 믿고 살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할 텐데 제 신앙이나 삶 자체부터가 ‘미지근한’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만, 그러나 저도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그런 신앙과 삶의 가치관을 본받으며 살고자 꾸준히 기도 및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감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보다 가치 있는 인간의 존엄성,
보다 가치 있는 생명의 존엄성,
그 진면목을 금세에 남기고
기쁘게 내세로 갈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생명과 생애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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