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배가 부르고
소유가 많아져서 부유해지면,
더 감사하며 더 행복해져야 할 터인데
이상하게도 되레 그 반대가 됩니다.
세상의 바닷물은 마실수록
더 갈증이 나는 것처럼,
되레 욕심이나 불만은 더 많아지고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지는 것이
차라리 ‘간사한’ 인간의 성정입니다.
실인즉 그것이 심령(心靈)이 겸손해질 수 없는
인간의 역설적인 또 다른 한계이자,
하나님과의 관계 아울러 이웃과의 관계가
거칠어지고 파괴되는 요인입니다.
따라서 먼저 ‘부자’가 된 유럽이나 북미 국가들의
교회가 쇠락의 길을 이미 갔거나 가고 있고,
우리 한국의 교회도 약속이나 한 듯 동일한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요인도 다 거기서 비롯됩니다.
선지자 모세도 인간 우리의 그런
‘간사한 성정’을 지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명기8:12-14)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했던
‘신앙이 독실한’ 저 이스라엘 역시 그렇게 약속이나 한 듯 쇠락과 망국의 길을 갔습니다. 따라서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겸손과 교만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타락한 성정’이나 그 소유욕이나 그 소유욕을 위한 기복신앙 그리고 그 소유로 말미암아 은근하게 교만해지는 역설적 변심이나 그 전철은 다 동일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너희 가난한 자는(you who are poor)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6:20)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가난’을 싫어합니다.
‘가난’ 그 자체에 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나 물질 그 자체는 죄도 악도 아니니까요. 돈 그것은 주인이 선하게 사용하면 선이 되고, 악하게 사용하면 악이 되는 ‘화폐’일 뿐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가난한 자는 그 심령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겸손할 수밖에 없기에 그 겸손한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저 말씀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기록했던 제자 마태의 이해와 그 핵심이 동일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5:2)
가난한 자의 심령이 그 가난으로 인해 되레 남을 시기하거나 원망하는 등 거칠어지거나 비뚤어진다면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겸손’도 아니고, 참 복의 실체인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것도 아닙니다. 되레 ‘악령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을 뿐이지요. 저를 포함해서 ‘가난한 자’나 ‘무식한 자’가 그 심령까지 거칠어지고 교만해지고 비뚤어지면 그런 사람은 정말 ‘꼴불견’입니다. 그런 사람은 ‘양’이 아니고 차라리 ‘뱀’이나 ‘이리’나 ‘늑대’가 되겠지요.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해진 자는 비록 가난해도 복이 있습니다. 참 행복의 비밀이자 참 축복의 비밀인 ‘하나님 나라’ 그 자체를 그 심령에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즐겨 말합니다.
오늘의 ‘번영신학’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부자여도 심령만 가난하면 복이 있는 것이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라고. 과연 그럴까요?
그런 사람들의 ‘말’이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더 옳은 것일까요?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보다 더 고매한 성정이나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인간 우리의 욕망 그대로 ‘재물’과 ‘천국’이라는 ‘두 세계’를 함께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축복이자 지고의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차라리 ‘간사한 성정’ 그 타락성이나 미래성을 꿰뚫어보시는, 저 ‘모세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God)과 재물(Money)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NIV·마태복음6:24)
‘킹 제임스 흠정역(KJV)’에는 저 ‘재물’이 ‘맘몬(mammon)’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격화된 ‘재물의 신 맘몬(Mammon)’으로 그 위상과 소속감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에도 ‘부, 재물’을 의미하는 ‘마모나스(mamonas)’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단언하신 이유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필요 이상의 부, 재물’ 그 자체가 바로 ‘세상의 신’이자 ‘물질의 신’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 곧 ‘두 신(神)’을 모신 채 살 수 있다는 ‘천민자본주의’는 그래서 행복이 아닙니다. 불행입니다. 그런 ‘복음’도 불행으로 인도하는 ‘왜곡된 복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솔직히 말씀드려 ‘돈이나 부나 재물’을 좋아하고 사랑하긴 해도, 그렇다고 그것이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려면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돈을 벌려고 애쓰다보면, 때론 지나친 욕심에 빠져 실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신격화’시킨 것은 정말 아니랍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그에 대한 해답을,
‘근세철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영국의 석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적’ 고백으로 대신해 봅시다.
-지나친 권력욕이 천사를 타락시켰다.
지나친 지식욕이 인간을 타락시켰다.-
그렇습니다.
‘지나친 소유욕’이 천사도 인간도 다 ‘타락’시킵니다.
‘탐심(貪心)’이 천사도 인간도 다 ‘타락’시킨다는 것입니다.
결정타는 바로 거기 있습니다. 비극도 불행도 바로 거기 있습니다.
‘지나친 재물욕’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절제나 자족(自足)의 미덕이 강조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느라.-(마태복음19:23-24)
저 말씀이 부자를 ‘시기해서’ 하신 말씀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부자’들이 놓치고 있고 잃고 있는, 진정한 가치와 구원과 참 행복을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언하신 것도 아닙니다. ‘어렵다’고 했으니까 가능성은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요.
문제는 부자가 '참 복' 자체인 '천국'에 들어가기가 왜 어렵냐? 그것입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고 나아가 ‘부자’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진다는 것이 차라리 간사한 인간의 성정이자 한계라는, 그 ‘타락성’에 대한 예언자적 내지 선지자적 통찰이자 확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래서 저 부자에게 되레 “가난한 자가 되라”는 역설적인 ‘축복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차라리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어 ‘천국을 소유한 자’가 되는 것이 더 복이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온전하고자(to be perfect)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19:21)
그러니까 말을 바꾸자면, “부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되레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따라서 ‘온전한’ 하늘의 보화 내지 복을 받고자 하면 스스로 “네가 가난한 자가 되라”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의 입맛이나 욕망이나 상식에 영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절충안을 제시해 볼 수도 있습니다.
실인즉 오늘의 신앙풍토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어른들’부터 그렇게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자인 채로 ‘하늘의 보화’ 및 ‘천국을 겸하여’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없겠습니까? 그 길이 그렇게 ‘온전하지’ 않고 좀 비뚤어진 길이어도 좋으니까요. ‘하나님’이나 ‘천국’보다는 ‘돈’이나 ‘재물’이 솔직히 말씀드려서 더 실속 있는 현실적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그에 대한 답은 분명히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케노시스(kenosis)’ 곧 ‘비움과 낮춤’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의 신앙적 내지 신학적 화두이기도 한 ‘인테그리트(integrity)’의 의미가 그런 것처럼 ‘온전성’은 곧 ‘청렴성’을 또한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는
유형의 합리적이고 달콤한 ‘번영복음’이 당장에는
대중들의 인기와 ‘우레 같은 박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왜곡된 복음’이 황금만능, 대형만능, 허세 및 허영, 이권, 비리, 좋은 게 좋은 적당주의, 부정부패, 이혼, 가정파괴 등의 세속화를 직접 내지 간접적으로 가속화시켰고, 목하 각종 사회적 불행과 비극의 ‘열매’로 증명되고 있는 오늘의 세태를 우리는 또한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되레 사회적 비판의 주요 대상이 되어 벌써부터 쇠락의 길을 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세태를 또한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 내지 민족을 올바르고 온전한 공의와 사랑으로 인도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과거적 기회를 이미 잃어버린 왜곡된 신앙풍토에 임하는 결과론적 증후군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일부 대형교회들이 이른바 ‘부자교회’는 되었지만 실상인즉 ‘하나님의 나라’ 그 진면목은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낙타’처럼 대형은 되었으나 진정한 ‘그리스도의 영성(靈性)’은 잃어버렸다는 반증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교회에서 선포되어야 할 진리는,
“부자가 복이 있다”는 ‘왜곡된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차라리 ‘불법’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게 하는 불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친 부자 내지 친 권력자 ‘복음’이 강조되면 될수록,
상대적으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가 되어간다는
역사적 반증 앞에서 우리는 겸허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자본주의나 그 현장인 시장이나 정치판에서
선포되는 것만으로도, 거기서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참 인간성이나 선한 양심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교회에서 선포되어야 할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참 복음’입니다.
우리는 “부자가 복이 있다”는 식의 ‘자본주의적 복음’이 득세한 지
한 세대를 채 보내지 못한 오늘, 벌써부터 재물과 탐욕과 정욕 등에 얽힌
그 각종 ‘타락한 열매’가 부메랑이 되어 되레 자기 내지 자기 세대,
자기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를 심판적으로 서로 때리고 해체하고 죽이는 세태를 또한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역설적인 ‘참 복음’의 그 진리됨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통감 및 절감하며, 충심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말세적 징조’를 다시금 묵상해봅시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24:)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력하고 분명한 미래관'을 가진 사람들 (0) | 2014.06.30 |
---|---|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들 (0) | 2014.06.23 |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존엄성을 위하여 (0) | 2014.06.09 |
철길 (0) | 2014.06.02 |
자연 속에서 들리는 '그의 음성' (0) | 2014.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