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강력하고 분명한 미래관'을 가진 사람들

이형선 2014. 6. 30. 09:33

 

 

-우리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 그려지느냐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달라지고,

 그날그날 이루어지는 행위의 윤곽과

 사고의 품격이 결정된다.

 

 

 미래관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무력하게 살게 마련이다.

 수많은 정서적 정신적 질환과

 대부분의 자살이 “미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언제나

 강력하고 분명한 미래관(未來觀)이었다.

 그 미래관의 가장 구체적인 특징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믿음이다.-

 

 

                                   〈유진 피터슨〉

 

 

 

 

               *    *    *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세계관 내지 우주관을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오늘의 시대에는 종교도 많고,

철학도 많고, 신령하다는 영매술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 모든 것들에 ‘강력하고 분명한 미래관’

내지 ‘강력하고 분명한 희망’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미혹이자 혼돈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나 떡이나 육체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의 이타적인 사랑의 가치나 의식에 열려져서,

남을 돕고 살리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미래관을 가진

사람은 공부를 해도 그 열심의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그 ‘사고의 품격’도, 언행의 품격도 다를 것입니다.

이웃을 돕고 살리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미래관을 가진

사람은 일을 해도 그 열심의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그 ‘사고의 품격’도, 언행이나 섬김의 품격도 다를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종말적인 미래관(未來觀)은

‘하나님의 나라’이자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왕정의 대명사인 다윗 왕이 ‘내 주(my Lord)’라고 고백했던,

‘왕중왕’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나 자기 가족, 자기 집단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방인들’도 다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심지어 ‘짐승들’도 다 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마태복음22:) 나라입니다. “사자와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독사와 장난을 치며 함께 노는”(이사야11:), ‘공존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적 내지 종말적 세계관 내지 희망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구현해야 할 현재적인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느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17:20-21)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심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자 ‘그리스도의 나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 영원히 살아있는 나라입니다. 오늘과 내일이 하나로 통할 때 영원(永遠)이 됩니다. 금세와 내세가 하나로 열릴 때 영원한 생명이 되고, 영원한 삶이 되고, 영원히 살아있는 나라가 됩니다.

그런 나라의 ‘진짜 시민권’을 ‘내 안에’ 소지했다면, 우리는 오늘 한국 땅에서 죽어도 기뻐하며 곧바로 천국(天國)이라는 내세의 나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을 준비한 자는 과연 복이 있습니다. 미국을 준비한 자보다 그 미래관, 그 희망의 높이와 깊이와 크기와 길이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심령에 품은 자는 세상의 그 어떤 고난이나 고통이나 실패나 박해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미래관과 절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아무리 타락해도,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재림(再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정의는 분명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도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오늘 병들었어도 실패했어도 좌절했어도 희망은 내일 다시 올 것입니다. 하늘의 때가 되면 절대 희망은 ‘재림’할 것입니다. 심지어 죽어도 절대 희망은 다시 올 것입니다. ‘부활’은 무덤 속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실인즉 사도 바울은 그래서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것. 세상에서 성공해도 좋고 실패해도 좋다는 것. 영원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큰 폭풍을 만나 죽을 지경에 이른 절대위기의 순간에도 태연하게 기도 및 찬양했던

저 ‘모라비안 성도들’의 고백 역시 그랬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 왜?

“살면 미국 가고, 죽으면 천국 가기 때문입니다.”

18세기 신앙위인 존 웨슬리도 소심했던 젊은 시절

그때 그 현장에서 큰 감명과 교훈을 받았다고 술회했었습니다.

 

 

정작의 숙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다시 오시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종말적인 진면목이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양’일 수 있느냐, 그것이겠지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마태복음25:31-33)

 

 

교파나 교단, 보수나 진보, 우파나 좌파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신교와 카톨릭으로, 대형과 소형으로 구분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로,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분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인과 무식한 자로 구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양과 염소’ 곧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할 뿐입니다.

절대기준이 선과 악입니다.

그럼 무엇이 그리스도의 선(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25:40)

 

 

그럼 무엇이 그리스도의 악(惡)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태복음25:45)

 

 

‘지극히 작은 자’라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그런 삶이 곧 하나님 및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선(善)이자 선교이자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종말적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삶이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는’ 종말적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그 절대기준과 가치에서 벗어나서 외식인 대형건물이나 진보니 보수니 하는 등의 정치 세력화나 자기 내지 자기집단의 세력화에 열심을 내는 등, ‘이 세대를 본받으며’ 좌나 우로 치우치거나 들러리가 될 때 교회는 그만큼 알게 모르게 타락하고 세속화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 곧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심을 통찰하시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의 모습은 과연

‘영생(永生)’을 살고 있는 ‘양’일까요?

‘영벌(永罰)’을 받고 있는,

스스로 배부른 ‘염소’의 모습은 아닐까요?

그리스도께선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내 양은 아니다”라는 의미의 말씀도 하셨지요.

우리의 고민은 거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20세기를 목회자로 살다간

신앙선배 윌리 J. 레이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는 있을 것이고

또한 그럴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누가 미래를 붙잡고 계신지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