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저 '높은 곳'과 저 '낮은 곳' 사이

이형선 2014. 7. 7. 08:28

 

 

-첫째 계명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진대,

 우리는 날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과

 최소한 한 시간은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시간이 도움이 되느냐,

 쓸모가 있느냐, 실용적이냐,

 결실이 있느냐 등의 질문은 전혀 엉뚱한 것이다.

 사랑 그 자체가 바로 사랑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오만가지 주책없는 일들을 생각하는 등)

 완전한 혼란 속에서 산더미 같은 분심(忿心)에

 짓눌리면서도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나날이 다달이

 하나님의 현존(現存) 안에 앉아있는 사이에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변화된다는 사실은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

 우리를 단죄하기는커녕 구원하도록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지나치게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방치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매번 그 시간이 쓸모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서른 번 아니면 예순 번 아니면 아흔 번

 그렇게 보내노라면,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홀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터득하게 될 것이다.

 아주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소란스럽기만 한

 우리의 자리 저 너머에서 줄곧 이야기하고 계셨음을

 점차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하니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라.-

 

 

                                         〈헨리 나우웬〉

 

 

 

                  *    *    *

 

 

 

 

‘당대의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의 글은

언제 읽어도 과연 영성의 깊이가 있습니다.

맑은 영혼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의 학문과 그의 삶이 하나된 신앙인격에서

절로 우러나는 향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영성의 비밀은 그것을 깊이 ‘맛본 자들’이

알고 공감하는 은총의 세계입니다.

 

그는 미국 명문 하버드대학 교수이기도 했지만,

어느 날, 화려한 명성이나 교수직조차 벗어버리고

조용히 저 ‘낮은 곳’으로 찾아갑니다.

기도와 묵상과 관상을 통해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 안에 앉아있는’ 시간 속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 내지 저 ‘낮은 곳’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에 열린 헨리 나우웬은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스스로 크고 높고 화려한 길을 버리고

저 낮은 곳의 삶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행방이 묘연했던 그가 마침내 발견된 곳은

‘라르쉬’ 캐나다 토론토 소재의

장애인공동체인 ‘데이 브레이크(Day Break)’.

그는 거기서 십년간 발달장애인들을 섬기며 살다가,

거기서 심장마비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64세였습니다.

 

 

프랑스어인 ‘라르쉬(L'arche)’의 의미는 ‘방주’라고 합니다.

‘노아의 방주’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지요.

19세기에 쟝 바니에 신부가 프랑스 그의 집에서

장애인 두 사람과 함께 살면서 시작되었는데,

그 의미를 살려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에 걸쳐

150군데 정도의 ‘라르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날 문서선교사역에만 전념해왔던 제가,

병원이나 교도소, 군부대 등에 배포했던 ‘무화과나무’라는 월간선교소책자 사역을 종간한 것은, 이후 한적한 시골 어딘가에 ‘라르쉬’ 같은 작은 예수가족공동체를 한 곳 직접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소외된 장애인들이나 인생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남은 생애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저로선 그것이 평소의 바람이자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부터가 보행이 많이 불편하고, 많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닌 저로서 독자적으로 공동체시설을 한 곳 설립한다는 것이, 한 마디로 현실적으로 어렵더군요. 그래서 나름대로 고민도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만, 마침내 그런 제 바람이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고 받아들였습니다.

60대의 나이인 저로서 이제는 내 앞이나 잘 가리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것입니다. 장애인공동체를 소신껏 직접 운영하려면 그것도 젊은 날 일찍이 시작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제 몫의 ‘달란트’로 다시 돌아와서 이 ‘영성편지’ 사역을 하고 있는 분수이지요.

저는 크고 거창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받은 달란트가 단 ‘한 달란트’다 쳐도 그것으로 ‘악하고 게으른 종’(마태복음25:26)이 아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고자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해왔고, 또한 해나가고 싶습니다.

 

 

각설하고,

얼마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장애인시설을 방문했을 때,

그곳 장애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의 상처가 있습니다.”

 

 

저는 그때 불운한 장애인들 속에서 십년 이상의 세월을 함께 생활하던 제 젊은 날의 아픔을 회상하면서, 거기서 때론 실존적으로 회의(懷疑)하기도 하고 때론 ‘살아계신다는 하나님’께 ‘단독자’로 질문하며 신앙적 내지 신학적으로 고뇌하던 제 젊은 날의 상처를 회상하면서, 저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한 마디로 응축된, 젊은 날 제가 하나님께 받은 분명한 해답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인간 이해, 고난의 이해는 거기서 비롯됩니다. 영성의 깊이와 통찰력도, 겸손한 인간 이해도, 인간의 존엄성 이해도 다 거기서 비롯됩니다. 과연 작은 자들의 불행은 ‘그리스도의 상처’이자 ‘대속의 상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유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의미 없는 고난도 없습니다. 금세와 내세에 걸쳐 다 복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상처이자 고난인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자의 몫으로 주어지는 ‘고난의 신비’이자 ‘영성의 신비’에 관한, 보다 깊은 은혜에의 열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묵상과 관상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 안에 앉아있는’ 시간 속에서,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저 ‘낮은 곳’에 대한 관심의 비밀을 알았던 헨리 나우웬 역시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스스로 크고 높고 화려한 곳을 버리고 저 ‘낮은 곳’의 삶으로 내려갔습니다. 장애인공동체 ‘데이 브레이크’로 내려간 것입니다. ‘어둠’이 아닌 ‘새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의 저서 「데이 브레이크(Day Break)로 가는 길」에 의하면, 그는 처음에는 장애인들을 ‘도와주러 왔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습니다. 스스로 ‘봉사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애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마침내 자신도 한 사람의 “장애인이자 장애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나누며 진정으로 ‘섬기는 자’가 됩니다. 나아가 그는 이렇게 체험적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라르쉬 생활은 복음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세상은 많고 크고 당당하고 정교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것을 좇는 이 땅에서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작은 것들을 즐겨 택하신다.-

 

 

그렇습니다.

‘작은 자’의 비밀도,

‘작은 것’의 비밀도 거기 있습니다.

‘영(靈이신 하나님’의 관심

곧 영성의 비밀에 그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낮은 곳’에서 고난과 고통을 앓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상처가 당신에게 있습니다.”

‘대속(代贖)의 상처’가 당신에게 있습니다.

치유 내지 구원은 금세에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처럼 내세의 ‘낙원’에서 되는 것도 있습니다.

영원한 소망이자 ‘산 소망’이 거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금세와 내세에 걸쳐

우리 인생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십자가 저 낮은 곳에서 스스로

‘상처 입은 치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치유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