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 하나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나는 보지 못합니다.
이 길이 어디서 끝나는 지도 나는 확실히 모릅니다.
나는 진실로 나 자신마저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주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나의 갈망만큼은 실제로 당신을 무척이나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면서 하는 모든 일 안에서
내가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그런 갈망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런 갈망에서 우러나온 일이 아니면
그 무엇도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이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내가 바른 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내가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에서
헤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언제나 당신을 의지합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고,
나 혼자서 위험과 싸우도록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
* * *
성경은 물론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심오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계시이자 영성 그 자체이지만,
서술된 언어는 지극히 평범한
서민언어이자 구어체 일상언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그런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일제치하에서 신실한 믿음을 키웠던
우리의 존경할만한 신앙 선조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한글을 해득할 수 있는 정도만 되면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거창한 신학이나 고도의 학문을 몰라도 말입니다.
그렇듯 신앙도 신학도 실인즉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유식하고 어렵게 풀거나 이상하게 풀려는 사람들일수록
되레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명제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저 토마스 머튼의 고백처럼 한 마디로,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그런 갈망”과 중심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과연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하는 모든 일 안에서’,
“내가 이 일을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까?”
먼저 그렇게 자문(自問)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주색이나 마약이나 도박에 빠지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약한 자들을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의로운 왕’의 대명사인,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실인즉 윤리적으로 그렇게 고상한 왕도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수도승처럼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은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윤리도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전임 사울 왕이 차라리 더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적어도 다윗처럼 충직한 부하 장군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우리아 장군을 전장 일선에 보내어 죽도록 사주하는 음모를 획책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길고 모진 고난의 세월을 ‘하나님 중심’으로 오래 참으며 잘 이기고, 민족 통일의 입지를 달성해서 통일 왕국의 왕으로 등극한 다윗 왕은 이후 국력이 막강해지자 ‘자기 중심’의 성취감과 궁중의 안일함 내지 한거(閑居)에 빠져 영적 민감성 내지 분별력을 잃고 저 불행한 ‘밧세바와 우리아 사건’을 저지르게 됩니다. 과연 고난을 이기기도 어렵지만 성공을 이기기는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런 죄악을 추상같이 꾸짖습니다. 그때 다윗 왕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겸허하게 충심으로 회개함으로서 하늘에 계신 참 왕이신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죄악에 대한 허물 내지 후유증은 남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사무엘12:10)
실제로 이후 ‘다윗의 집안’에 곧 왕자들 간에 서로 죽고 죽이고,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반역 사건이 일어나고, 왕국이 남북(南北)으로 나뉘어 서로 죽이고 죽는 등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합니다.
‘칼이 떠나지 아니하는’ 다윗 왕이나 그 집안 너무 부러워할 집안도 아닙니다. 그 ‘칼’이라는 저주와 죽음의 세계로부터의 구원과 대속(代贖)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친히 오셨다는 데 절대 주목해야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정체성은 ‘다윗의 후손’이 아닙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다윗 왕의 ‘나의 주(my Lord)’입니다.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이라는 영성의 비밀이 거기 있습니다.
돌이켜, 다윗 왕은 ‘하나님을 업신여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선지자를 통해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고 질책하신 것일까요? 상대적으로 부하이자 작은 자이자 이웃인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그 파렴치한 소행이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업신여긴 파렴치한 소행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거룩하고 경건하고 고상해야 할 성경은,
왜 위대한 다윗 왕의 치명적인 치부(恥部)일 수 있는
저 수치스러운 사건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악행이나 불의한 사건이나 치부는 다 생략해버리고,
하나님을 거룩하고 경건하게 잘 믿었다는 선하고 의로운 행적들만 나열했다면
후세들의 신앙에 더 귀감이 되고 교훈이 될 것 아닙니까?
‘이조왕조실록’처럼 실세들에 의해 적당히 가감 내지 미화되는 것이
후세들에게 더 좋은 교훈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진실을 기록하는 성경’은 어떤 인간도 미화시키지 않습니다.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며 자칭 민족주의자연했던 모세의 성정이나 치부도,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의 행적이나 치부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인 성녀를 포함해서 특정 인간을 미화시킨다 것은 그 자체가 위선이자 교만의 함정일 수 있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그 누구도 온전한 ‘선지자’일 수 없고, 온전한 ‘왕’일 수 없고, 온전한 ‘수제자’이자 ‘제사장’일 수 없다는, 그 타락성과 한계에 대한 강조이자 증언인 것입니다. 따라서 저 다윗이나 저 모세나 저 베드로의 죄악이나 치부는 인간 우리 모두의 죄악이자 성정이자 치부이자 한계의 ‘대명사’가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있었기에 다윗 왕이 위대한 다윗 왕이 될 수 있었고, 모세가 대선지자 모세가 될 수 있었고, 베드로가 수제자 베드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주목하는 것이 절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이 위대한 왕이자
‘신앙영웅’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어렵게 풀 것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오한 은혜와 긍휼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자 하는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요인은 한 마디로,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그런 갈망”을 가지고 살았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그 후 ‘집안의 칼’에 의해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시편62:2), 암담한 사망의 골짜기 내지 극한의 고난과 고통의 딜레마에 빠집니다. '포스트 다윗' 그 왕위 계승권을 놓고 왕자 솔로몬과 암투를 벌이던 왕자(네째아들) 아도니야로 추정되는 그 반란의 무리들의 '깊은 수렁'에 빠진 것입니다. 성공한 높은 자리에서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면 그 혼란이나 고통이나 충격은 더 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다윗은 오직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할’ 일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되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합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in pain and distress),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시편69:29-32)
그렇게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중심을 가진 다윗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에서 헤매는’ 다윗 왕이 그럴수록 그런 중심으로 더욱 주님을 의지하자 그런 다윗 왕과 ‘함께 해주십니다.’ 그래서 인간 다윗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위대한 다윗’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실 작정입니까?
먼저 이렇게 자문(自問)해 봅시다.
진실로 ‘복이 있는 자’가 될 수 있는 자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일까?”
당신의 과거가 발목을 잡습니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닙니다.
과거의 행적도 공적도 죄악도 아닙니다.
과거의 죄악이 매우 크고 많습니까?
이웃 내지 사람들에 대한 죄악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빚(debts)’입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크게 매우 많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all the more) 많다”(로마서5:20)는 성경의 비밀, 은혜의 비밀을 또한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범죄(自犯罪)’라는 죄악의 정도는 물론 개인적으로 그 차이가 있겠지만 타고난 ‘원죄(原罪)’를 가진 인간 우리 모두는 어차피 근본적으로 우리의 능력으로는 지불이 불가능한, ‘일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빚진 자들’이니까요.
주목할 것은 매우 크게 회개했다면서, 매우 크게 뻔뻔하면 하나님이 결코 함께 해주시지 않는다는 그것입니다. 인간도 ‘크게 뻔뻔한 빚쟁이’와 함께 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불행해집니다. 과거의 죄나 허물이 클수록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욱 겸손해야 할 필연이 거기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근본적 내지 태생적으로 그리고 과거적으로 모두가 ‘죄인이자 빚쟁이’인 인생 우리에게 과거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그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그리고 미래입니다.
과거적으로 ‘이단의 무리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잡아서 죽이는 데까지 앞장섰던 치명적인 전력과 과오와
치부가 있었던 열혈 유대교인이자 당대의 지식인 ‘사울’.
그런 그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신비체험을 통해 충심으로 크게 회개한 이후,
이름조차 ‘바울’ 곧 ‘작은 자’로 바꾼 후
오직 그리스도의 사도로 외길의 삶을 살다갔습니다.
그런 그 역시 그의 삶의 소망을
이렇게 한 마디로 집약시키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세상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린도후서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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