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무엇이 '큰 일'이고, 누가 '큰 사람'인가?

이형선 2014. 7. 28. 10:33

 

 

-그대가 오늘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라.

 먼저 큰 사업을 해보아야겠다는 마음을 버려라.

 예레미야는 그의 제자 바룩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예레미야45:5)고 하였다.

 우리는 모두가 사회를 이끌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혁신사업이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 혁신할 영역이

 떠맡겨져 있지 않는가?

 그대는 이미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 들어서 있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대의 가족과

 그대의 친구들부터 가르치라.

 그대의 이웃에게 위로의 냉수 한 잔을 주어라.

 그대에게 찾아오는 거지에게 자선을 행하고

 그들을 빈손으로 그대의 집 문밖으로 내쫓지 말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정신만 있으면

 우리가 오늘 처해 있는 위치에서라도

 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    *    *

 

 

선지자 예레미야의 절친한 친구이자 제자인 바룩은

위험을 무릅쓰고 예레미야의 사역을 도운 사람입니다.

친(親)애굽파 일색이던 ‘거짓선지자들’이 애국자 행세를 하며 득세하던

유다왕조 말기에, ‘예루살렘의 함락’과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예언했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참선지자인 그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서 하나님이 그의 ‘들을 귀’를 통해 들려주신 그대로 말씀을 선포했지만, 그러나 그래서 되레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던 동족 이스라엘에게 배신자 내지 거짓선지자 취급을 받고 궁중 감옥인 ‘시위대 뜰’이나 ‘토굴 감옥’에 갇히는 등 모진 고난과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런 예레미야가 당시 유다 왕 여호야김과 방백들의 미움과 배척을 받아 성전 출입을 금지 당했을 때, 예레미야가 구술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필한 사람이 바로 바룩입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책에 기록하니라.-(예레미야36:4)

 

그렇게 대필을 마친 바룩은 예레미야 대신 성전으로 올라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에게 명령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성전에서 책에 있는 모든 말씀을 낭독’까지 합니다.

그렇게 국운이 기울어가는 혼돈과 혼란의 시대에

하나님의 사역에 감히 동참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룩에게도 생명의 위협과 고통이 가해지는 수밖에요.

하나님의 의로운 일에 동참하고, 참선지자 예레미야의 고난에 동참했지만

그 결과는 고통과 탄식만 더해지는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신세 한탄을 토로할 지경이었습니다.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예레미야45:3)

 

현실을 사는 오늘 우리의 신세 한탄이자 토로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일 내지 선한 일을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 결과가 되레 고통과 실망 일색이다 싶을 때, 나름대로 신앙생활 내지 교회생활을 열심히 잘한다고 했는데 복(福)을 받기는커녕 되레 ‘고통에 슬픔만 더해진다’ 싶을 때 토로하는 우리의 하소연이자 탄식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하간 그런 바룩은 하나님만 믿고 있다간 어느 순간에 적대세력들의 손에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싶었든가 봅니다. 그래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자기 목숨을 자기 스스로 지키기 위한 모종의 ‘큰 일(great things)’을 도모합니다. 개역성경에는 ‘대사(大事)’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경영(經營)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물론 바룩이 경영하려던 그 ‘대사’ 그 ‘큰 일’이 무엇인지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바룩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개정개역, 예레미야45:5)

 

그러니까 부연하자면, 네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너의 큰 일’이 ‘나의 큰 일’은 아니다. 죽고 사는 일은 오직 나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부질없는 짓 그만두고, ‘너의 고통’이 커질수록 나 하나님을 더욱 크게 믿고 의지해라.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너의 생명을 지켜줄 자는 오직 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생명을 지켜주고, 살려줄 것이다. 그런 의미의 말씀이 됩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깊었던

일본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의 말씀처럼,

우리는 ‘큰 일’ 내지 ‘큰 사업’을 하는 ‘큰 사람’이 되기를 좋아합니다.

사회적으로 여론을 주도하는 주류세력 내지 실세인 권력자나 부자나 명사가 되기를 좋아합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기를 좋아합니다. 실인즉 그것이 이 세상이 말하고 가르치는 ‘축복’이자 ‘성공’이자 ‘출세’입니다.

문제는 그런 일이나 그런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참 ‘큰 일’이자 참 ‘큰 사람’이냐? 거기 있겠지요. 남을 가르치는 일보다 자기를 가르치는 일이 실인즉 더 어렵다는 데 있겠지요.

 

어떤 일이 진실로 진실로 ‘큰 일’이고,

어떤 사람이 진실로 진실로 ‘큰 사람’일까요?

종교 내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통일그룹’이나

‘세모그룹’을 이루는 일이 ‘큰 일’이고,

대형목회를 하거나 대형교회당을 짓는 일이 ‘큰 일’이고,

그것에 성공한 사람들이 진실로 ‘큰 사람’들일까요?

천하의 정치권력이나 재물을 얻는 ‘큰 일’을 하고,

그것에 성공한 사람들이 진실로 ‘큰 사람’들일까요?

 

 

저는 그런 분들보다,

나환자들 속에서 한평생을 살면서,

그들의 영혼은 물론이고

때론 그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면서

그들의 일그러진 육신을 치유하고 품으며 살다가

6·25 동란의 와중에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이나,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마침내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되레 더 ‘큰 일’을 하신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참고로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수재이자 시대의식이 깨어있었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다가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고 휴학생으로 있을 당시, 한국 최초의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님의 집회에서 신비한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이후 그는 영적으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방향을 돌려서’ 신학생이 됩니다. 평양신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목사가 된 그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이후 한국인들에게 ‘덴노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고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으로 황민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강요했던 당시의 일본식 국교일 수 있었던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순교하신 분입니다.

 

 

각설하고, 저 손양원 목사님이나 저 주기철 목사님은 그렇게 참혹하게 순교당하셨지만 그러나 오늘도 살아서 신앙후배들인 우리에게 계속 절절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분들에게는 죽어도 사는 ‘신앙의 목숨’이자 ‘영원한 목숨’ 곧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복음16:26)

 

그렇습니다.

‘온 천하를 얻은’ 권력자나 부자가 된들, ‘세모그룹’을 이룬 ‘큰 종교지도자’가 된들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원한 가치 곧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느 짐승과 하등 다를 것 없는 허무한 죽음 그것은 결코 어느 특정인만의 최후는 아닙니다. 인생 우리 모두의 최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진면목은 지혜자 솔로몬의 말씀처럼 ‘잔칫집’이 아닌 ‘초상집’에서 증언되는 것이겠지요. ‘성전 꼭대기’가 아닌 ‘골고다 십자가’에서 증언되는 것이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에 의하면, 왕좌 내지 권좌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고자 다투던 제자들이 도모하는 일이 결코 ‘큰 일’이 아니었고, 그들이 결코 ‘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물질의 신(the Mammon)’을 모신 부자나 재벌들이 도모하는 일이 결코 ‘큰 일’도 아니었고, 그들이 결코 ’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은 것’처럼 버려진 자를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하고 지나친 ‘한 제사장’이나 ‘한 레위인’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 일’을 하는 자들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율법이 그랬던 것처럼 거룩한 일이자 ‘큰 일’인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피나 시체를 만져서 부정을 타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시체처럼 버려진 자를 못 본 척 외면하고 오직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서둘러 올라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평가하신 ‘큰 일’을 한 ‘큰 사람’은 되레 강도에게 강탈당하고 뭇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외면당한 채 버려진 한 사람의 ‘아웃사이더’를 자기 몸처럼 돌본 ‘천한’ 그러나 ‘선한 사마라아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컫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컫음을 받으리라.-(마태복음5:19)  

 

우리의 가치관은 태생적으로 인위적 정치적 경제적인 자기 과시나 과장.

허세나 허수나 허영 등이 득세하고 위세를 부리는 이 세상의 속물적 기준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것이 타고난 ‘원죄’의 성정이자 타락성이기도 합니다. 그런 죽을 생명이나 가치관에서 거듭나는 것이 곧 구원(救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거듭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이 서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하등 다를 것도 없고 구별되는 것도 없다면 그것은 ‘세속화’라는 죽음의 병이 이미 깊어졌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친히 사심도 욕심도 없이 사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되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누가복음19:17)고 강조하셨고, 그런 삶을 친히 사셨던 분입니다. 진실로 ‘큰 일’을 한 ‘큰 사람’은 진실로 자기를 가장 크게 부인하며, 가장 크게 비우고 낮추는 사람입니다.

 

유대 땅 안에서만 공생애 사역을 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이후의 사도들이 낯선 ‘땅 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한 것이나, 특히 다메섹 도상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이후의 사도 바울이 마게도니아 및 로마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등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요한복음14:12)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백처럼 스스로 ‘작은 자 중의 작은 자’요 ‘죄인 중의 괴수’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a servant of Christ Jesus, 로마서1:1)’이라는 자기 분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의 세계가 큰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참고로, ‘주의 형제 야고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 일’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야보고서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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