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인간의 '욕망'과 '행복' 사이

이형선 2014. 7. 14. 09:35

 

 

-이 세상에서도 행복해지려면 상당히

 많은 자제(自制)가 필요한 법입니다.

 따라서 강하게 발동하는 욕구들은

 전부 건강하고 온당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욕망은 허용하고

 어떤 욕망은 거부해야 하는지에 관한

 일련의 원칙들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적 원칙에 따라,

 어떤 이들은 위생학적 원칙에 따라,

 어떤 이들은 사회학적 원칙에 따라 이렇게 합니다.

 

 즉 진정한 갈등은 기독교냐

 ‘본성(本性)’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제어하는 일에서 기독교적 원칙을 따르느냐

 다른 원칙을 따르느냐에 있습니다.

 인생을 망치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본성’(자연스러운 욕구라는 뜻에서 ‘본성’)을

 제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

             

              

              *    *    *

 

 

 

사람은 누구나 먹고 마셔야만 삽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입니다.

제 때 ‘강하게 발동하는’ 배고픔을 알고

제 때 ‘강하게 발동하는’ 목마름을 아는,

식욕(食慾)은 지극히 건강하다는 반증입니다.

입맛 혹은 밥맛을 잃어버린 ‘사람의 입’

그 자체가 얼마나 큰 병증이던가요.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압니다.

식욕을 자제 내지 절제하지 못하면

그 자체가 탐식(貪食)이 되고 탐욕이 되어

비만증 등 각종 성인병을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기근에서 오는 질병보다

과식이나 탐식 등에서 오는 질병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의학계 데이터 정도는,

이미 주지의 사실입니다. 과연 사람은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도 ‘자기를 부인하며’

식욕을 절제해야만 합니다.

과연 사람은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도,

‘떡’이나 ‘돈’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절제의 ‘말씀’으로 살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사회학적 원칙’이나 상식보다

더 높고 절제된 윤리입니다.

더 높고 절제된 인격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4:4)

 

사람은 누구나 이성(異性)에 대한

사랑의 욕구를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입니다.

제 때 ‘강하게 발동하는’ 성욕을 가진 사람은

지극히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압니다.

제 집 화장실에서 소대변을 보면

정상적이고 건강한 배설행위이지만,

이웃집 앞이나 대로변에서 소대변을 보면

각종 사회적 악취와 독소를 유발하는

위법이자 불법이 된다는 것을.

그렇듯 성욕을 자제 내지 절제하지 못하면 그 자체가

탐색이 되고 외도나 불륜이 되어 각종 사회적 살상이나

가정 파탄, 이혼 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또한 ‘성(sex)’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성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이런 말씀도 하셨고,

친히 그렇게 사셨습니다.

 

-천국을 위하여(because of the kingdom of heaven)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마태복음19:12)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 혹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도대체 무에관데 식욕조차 절제해야 하느냐?

‘천국’이 도대체 무에관데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는 것이냐?

저도 그에 대한 답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육체적 욕구 내지 욕망에 초탈한 존재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저기서 상대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천국’이나 ‘말씀’의 가치는, 그만큼 비교우위이자

절대적인 것임이 분명하다는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내지 우리를 불행에 빠트리기 위해서

차라리 금욕적인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인간 우리의 육체적 쾌락이나 도락을 시기하며

배가 아파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인생 우리의 참 구원과 참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위생학적 원칙’이나 상식보다

더 높고 절제된 윤리입니다.

더 높고 절제된 인격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기독교 평신도 90% 정도가

‘무속적인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무속적인 기복신앙’의 의미가 뭡니까?

한 마디로, “내 가족 내 자녀 내 집안 모두 다 복에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고 잘 되게 해주십시오”, 그것 아닙니까? 한 마디로 ‘행복’을 기원하는, 그런 기복신앙이나 기원이나 소원은 저에게도 있습니다. 병들고 못되고 못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세상에 계신 부모님의 뜻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런 기원이나 기도 자체가 나쁠 것도 없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의 문제는,

우리가 기원하며 먼저 구하는 그것이 ‘참 행복’과는 늘 거리가 멀다는 거기 있습니다. 참 행복의 세계인 ‘천국’과는 늘 거리가 멀다는 것. 우리의 복(福) 개념에 대한 타성은 늘 육체적 내지 세상적인 복을 구하는데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그 중심이 늘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라.-(마태복음6:33)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먹고 마실’ 것도, ‘시집가고 장가갈’ 일도 책임지고 해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인생 범사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그 매듭이 풀어지는 것 아니던가요?

‘말씀의 복’ 내지 ‘하늘의 복’은

그것을 믿는 자의 복이자

그것을 행하는 자의 복입니다.

그것을 믿는 분량 그 만큼의 복이자 몫입니다.

일테면 우리가 계시의 말씀을 50% 믿으면 50%의 복을 받고,

100% 믿으면 100%의 복 내지 몫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우리의 복 개념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언처럼 늘 근시안적이고 세상적입니다. 영원한 내일 곧 ‘내세(來世)’를 보지 못합니다. 육체적 내지 세상적 내지 탐욕적인 ‘복에 복(福)을 더하는’, 이기적이고 쾌락적인 복(福) 중심으로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본래적인 타락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세상의 복 앞에서 약합니다. 그래서 그런 ‘세상 복’만 많이 준다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좋고, 부처님도 좋고, 점치고 굿하는 각종 무속신도 좋고, 서낭당의 서낭신도 좋다는 식으로 구하고 찾습니다.

따라서 그런 ‘세상 복’ 중심의 삶을 사는 행태는 똑같은데, 다만 그 구하는 명분 내지 방법론이 과거의 ‘무속신 내지 서낭신 이름으로’가 아닌, ‘예수 이름으로’ 바뀐 신앙유형의 사람들이 바로 ‘무속적 기복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런 자기 내지 사람 중심의 모든 ‘신앙 유형’은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복’도 아닙니다.

 

-(베드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must deny himself)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16:23-2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내지 자기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라니?

예나 지금이나, 창세기의 아담이나 우리 현대인들이나

하나같이 다 가장 싫어하는 말이자 구속이자 제한일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래야만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물론 아닙니다. 실인즉 나 자신,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가르치는 참 스승 그리스도의 말씀이자

우리에 대한 심오한 그리스도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닙니다. 나보다 나를 잘 알고,

나보다 크고 나보다 지혜로운 하나님 긍정을 위한 자기 부정인 것입니다.

대아(大我) 긍정을 위한 소아(小我) 부정인 것입니다.

 

해박한 학자이자 작가였던 저 루이스의 체험적 고백처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해지려면 상당히

많은 자제(自制)가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 역시 오늘도 내일도,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행복해지려면, 보다 많은 욕망과 언행의 자제가 필요할 것입니다. ‘인생을 망치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기를 부인할 줄 알아야하고, 자기를 절제할 줄 알아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그만큼 자족할 수 있고,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터이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왕궁에서 호의호식한 ‘카이사’나 ‘헤롯왕’도 ‘진시황’도 아니었고, 색한(色漢)의 대명사인 ‘카사노바’도 ‘변강쇠’도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부활’이 그것을 증명 내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요? 주님은 동쪽 좁고 낮고 누추한 길을 가고 계시는데, 우리는 “주여 주여” 하면서 서쪽 넓고 높고 화려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