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들

이형선 2014. 6. 23. 09:46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는 종종 병든 자와

 슬픔을 당한 자를 위하여 주님께 간구합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병들어 누웠거나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때때로 특별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인지

 적시에 알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우리 인생 모두가 이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님께서는 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질병으로 우리 모두가 고통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 질병 속에서 주님을 굳게 붙잡도록 도와주옵소서.

 이 질병에서 구원받을 때까지

 주님만을 붙들게 도와주옵소서.-

 

 

                                               〈키에르케고르〉

 

 

 

  

              *    *    *

 

 

 

 

병원에만 ‘병든 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환자실에만 중환자들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곳곳에 ‘병든 자’들이 있고,

사회 곳곳에 ‘중환자들’이 있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매일 들려오는 ‘소식’ 자체가

그 통증들 아니겠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 분야에서

이기심, 탐심 같은 병든 소리, 앓는 소리,

살상의 소리가 들끓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따라서 세상 자체가 큰 병원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병든 자들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들.

유서는 한 장의 백지로 족합니다.

빈손으로 가는 죽음의 길 앞에서,

정작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거룩한 고민’은 그래서 필요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그렇습니다.

목하 승리의 영광을 안고 돌아오는 로마의 개선장군이여.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부자여, 권력자여, 스스로 크고 높은 자여.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불과 몇 년, 보다 앞에 가고 뒤에 갈 뿐이다.

그것을 기억하라! 그것이 진실이고 지혜니라!

그런 의미 아니겠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병자들 내지 죄인들이

세상이라는 ‘병원’에 온 것은,

‘병원’에서 내로라 성공 및 행세하는, 어리석은,

부자나 권력자나 명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유 받고

보다 가치 있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보다 의롭고 보다 선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보다 겸손하고 보다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숙명이자 숙제인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우리를 치유 및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의사는 누구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의 체험적인 고백을 통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Lord)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10:9)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참 구원과 참 생명과 참 소망을 알고,

우리의 가치관은 분명히 변할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참 두려움과 참 공경과 참 겸손을 알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분명히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義)’ 중심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심이나 탐심의 노예가 되지도 않고,

세상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의 노예가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열심히 산 사람들이 의식주(衣食住) 같은

세상에서의 ‘일용할 양식’ 내지 ‘필요한 양식’이

없어서 굶어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필요한 양식’ 이상의 소유에 연연하는

그것이 바로 ‘탐욕’이고 ‘정욕’입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주색 등에 중독되어,

그 노예로 산 사람들일수록 그 끝이 허무하지 않던가요?

개나 돼지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달라야하지 않을까요? 

어떤 삶이 허무한 죽음이고,

어떤 삶이 영원한 생명이자 영원한 축복일까요? 

그래서 ‘거룩한 고민’은 필요합니다.

 

 

“메멘토 모리!”